22대 국회 역대 최다 31회
원내 전략 수단으로 변질
마비된 민주주의의 시간

[초동시각]애물단지가 된 필리버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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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파의 합법적인 의사진행 방해 행위를 뜻하는 필리버스터. 국회법에는 '무제한토론'이라 명기된 이 제도는 22대 전반기 국회에서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빈번하게 활용됐다. 하루짜리 필리버스터에 불과할지언정, 39년 만의 개헌 시도마저 무너뜨릴 정도로 그 위력은 대단했다. 주말 내내 국회를 열어서라도 개헌안을 설득하겠다는 우원식 국회의장 결의도, 여야 합의 처리 법안마저 필리버스터를 하겠다는 국민의힘 전략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결국 우 의장은 지난 8일 개회한 지 17분 만에 눈물을 흘리며 산회를 선언했다. 그는 "필요한 법안을 제때제때 처리해야 국민 불편이 줄어든다는 상식적인 국회 운영에도 어깃장을 놓는 이 상황이 저는 정말 분통이 터지고, 눈물이 나올 것 같고, 정말 화가 나고 답답하다"고 심경을 토로했다. 전반기 국회 내 마무리 짓겠다고 마음 먹었던 법안들까지 속절없이 미뤄진 것에 따른 울분을 표현한 것이다.

이제 필리버스터는 원내 전략의 한 수단으로 치부된다. 최장 필리버스터 경신 여부 정도만 관심사가 될 뿐이다. 한밤 국회 본회의 연단에서 진행되는 호소는 외로운 외침에 그치기 일쑤고, 세간의 관심 바깥에 놓였다.


국회선진화법이 도입되고 2016년 첫 번째 필리버스터가 있었을 때만 해도 분위기는 달랐다. 테러방지법을 둘러싸고 연단에 오른 의원 발언은 국민적 관심사였다. 2월23일 시작해 3월2일에야 끝난 192시간의 필리버스터에 야당 의원 38명이 1660쪽의 속기록을 남겼다. 테러방지법 처리를 막지는 못했지만, 이 시간은 '민주주의의 시간'으로 불렸다.

칭찬의 대상에서 애물단지로 변한 이유, 무엇이 달라진 것일까. 우선 '비상수단'에 해당하는 필리버스터가 22대 들어 남용된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다수당은 설득이나 타협 대신 강행을 선택하고, 소수당은 필리버스터를 반격 수단으로 활용했다. 강성파 목소리 앞에 중도파는 침묵했다. 그 결과 22대 국회 들어 역대 최다인 31차례 필리버스터가 진행됐다.


필리버스터 무게감도 사라졌다. 필리버스터는 토론종결권 의석(재적의원 5분의 3 이상)을 확보한 여권이 번번이 토론 개시 후 하루 만에 종결에 나서면서 하루짜리로 끝나곤 했다. 잠도 못자고, 밥도 못 먹고, 힘겹게 대화를 이어가는 정치인들의 사투가 기억에 남을 틈도 없이 마무리됐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다 보니 필리버스터는 여당의 법안 처리에 야당이 항의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전락했다. 결국 더 강한 해법을 찾게 된 야당은 본회의에 상정된 법안 모두에 대해 필리버스터를 하는 방안을 꺼내 들었다. 수십 건 또는 수백 건의 안건이 한꺼번에 표결되는 본회의 특성상 야당이 모든 현안에 대해 필리버스터를 걸면, 의사일정을 마비시킬 수 있다.


개헌안 좌초 이후 여권에서는 국회법 개정 카드가 다시 거론된다. 필리버스터 진행 중 의원 60여명의 본회의장 상주를 의무화하는 '유지 정족수' 도입이 유력하다. 결국 또 힘에 의한 해법이다. 야당의 더 극단적인 반격을 부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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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후반기 국회마저 극한의 대결로 점철할 것인가. 해법은 거창한 데 있지 않다. 의회주의란 다수가 소수를 설득하고, 소수가 다수를 견제하되 대화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이다. 극단적 강행 처리 대신, 의회주의 본령에 따라 무수한 협상과 설득이 이어지길 바란다. 우리 민주주의가 그동안 증명해 왔듯, 만남 속에 길이 있다.


나주석 정치부 차장 gonggam@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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