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레이트]소현세자 죽음의 배후는 누구인가
소현세자 죽음 미스터리 다룬 영화 '올빼미'
인질로 끌려가 서양사상 준비한 개혁가
조선 역사, 자기 주도의 근대화 기회 놓쳐
※ 이 기사에는 영화 스포일러가 될 만한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온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 모두 선혈이 흘러나오므로, 검은 멱목(헝겊)으로 그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빛을 분변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
인조실록에 기술된 소현세자 시신 상태다. 염습에 참여한 친족 이세완을 통해 전해졌다. 시신의 흑색과 눈·귀·코의 피는 학질로 인한 사망 증세와 거리가 멀다. 그래도 일각에선 질병 사망설을 주장한다. 검은 변색의 원인을 부패로 추정한다. 그렇다면 아버지 인조의 대처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왕이나 세자가 승하하면 의관(醫官)에게 잘못이 있는지 국문하는 게 관례. 인조는 오히려 이형익을 두둔했다. 송준길과 대사헌 김광현까지 나서서 고해도 꿈쩍하지 않았다. 졸지에 아들을 잃은 아버지치고 냉정하고 단호했다.
영화 ‘올빼미’는 인조(유해진)를 소현세자(김성철) 독살의 주범으로 가정한다. 이형익(최무성)에게 재주를 인정받아 궁에 들어간 천경수(류준열)가 살해 현장을 목격하고 위태로워지는 상황을 긴장감 있게 전한다. 무리한 설정은 아니다. 인조는 자신을 ‘화살 맞은 새’라고 비유하곤 했다. 화살은 황동혁 감독의 영화 ‘남한산성(2017)’에서 조명된 삼전도 굴욕이다. 수성에 실패해 청 태종 앞에 무릎을 꿇고 항복했다. 많은 신하와 왕자들은 인질로 붙잡혀 갔다. 소현세자도 그중 하나였다.
소현세자는 1625년 열세 살에 세자로 책봉됐다. 정묘호란 때 전주로 내려가 전쟁을 독려했고,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 들어가 항전했다. 인질이 돼 끌려간 심양에서도 활달한 기개는 사라지지 않았다. 8년 동안 천문, 지리, 수학, 지동설, 항해법, 화포 제조법 등 서양 문물을 터득했다. 그는 스승이나 다름없던 아담 샬 신부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다.
"저의 왕국에 돌아가는 즉시 각종 기술을 궁중에서 사용할 뿐 아니라 출판해 학자들에게 널리 알리고자 합니다. 장차 사막을 박학의 전당으로 완전히 바꾸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 확신합니다."
먼지 덮인 숭명사상 대신 서양의 사상과 과학기술로 조선을 깨우려 한 개혁가. 인조는 정반대였다. 여전히 청과 화친을 불편하게 생각했다. 그는 삼전도 협약에서 명과 외교관계를 단절하고, 청이 명을 정벌할 때 지원군을 파병한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내부의 숭명의식이 강해져 병력을 약속 장소에 늦게 보내는 등 눈에 보이지 않게 태업했다. 분위기가 경직될수록 국내에서 세자의 위치는 애매해졌다. 부정적 프레임에 갇혀 부자 사이가 소원해지기에 이르렀다.
화살 맞은 새는 화살만 보면 묵은 상처가 도지는 법. 그렇다고 아들을 죽이는 아비는 없다. 하지만 인조에게는 몇 가지 이유가 더 있었다. 김형진 변호사는 저서 ‘인조의 나라’에 "인간 인조의 권력에 대한 집착, 직위에 걸맞지 않은 협량, 의심과 불안감을 꼽지 않을 수 없다"며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인조는 병자호란 전부터 여론의 향배에 따라 친명과 친청을 오락가락했다. 아무런 준비 없이 청과의 대결을 선언하는가 하면 삼전도 이후에는 척화파를 비난하며 관직을 박탈하고 유배를 보내는 등 그들을 패전의 희생양으로 삼았다. 그에게는 국가의 치욕이나 황폐, 백성의 고초보다 왕권 유지의 여부가 더 중요했고, 그렇기 때문에 심양으로 끌려가는 입조(入朝)에 대해 병적 반응을 보였다. 원나라 때 고려왕들의 예에 따라 입조는 곧 자신의 퇴위와 세자의 등극을 의미하는 것으로 인식했다."
안태진 감독은 소현세자의 귀국 행사를 건너뛰는 모습에 불안한 징후를 압축했다. 실제로 벌어진 일이다. 예조(禮曹)에선 2차 귀국 때 환영 행사가 없었던 점을 지적하며 성대한 거행을 진언했다. "저번에는 ‘영원히 돌아오는 것이 아니니, 꼭 거행할 것이 없다’라는 말씀으로 전교하셨는데 지금은 세자가 영원히 본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으니, 실로 전에 없던 온 나라의 막대한 경사입니다." 인조는 행사 규모를 줄이라고 지시했다.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도성 경계로 나와 맞으라는 사신의 요구도 거부했다. 신하들에게 부축받아 대궐 뜰에서 그들을 접견했고, 사신에 대한 접대도 등급을 낮추라고 명했다.
인조의 이상 행동은 소현세자의 죽음 뒤에도 계속됐다. 입관을 서둘렀고, 장예의 격을 낮췄다. 능호의 격도 원(園)에서 묘(墓)로 강등했고, 3년간 입어야 할 자기의 상복 착용 기간도 이레로 줄였다. 1년간 입어야 할 신하들의 복제 또한 석 달로 단축했다. 사신조차 "대신도 또한 예를 가지고 쟁론하지 않아서 드디어 막대한 상을 끝내 예에 어긋나게 치러지게 하였으니, 매우 한탄스럽다"라고 말할 만큼 졸속한 처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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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세자의 갑작스러운 사망은 조선 역사에서 분명 아쉬운 순간이다. 메이지 유신에 나선 일본처럼 자기 주도의 근대화를 이룰 기회를 놓쳤기 때문이다. 각종 문헌에 따르면 소현세자는 인질 신분에도 적극적 자세로 주어진 임무를 이행했다. 김상헌 등 척화신들이 잡혀 와 북관에 갇혀 있을 땐 사실상 옥바라지 노릇도 자처했다. ‘올빼미’는 개혁의 가능성이 마구잡이로 짓밟혀 소멸하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마냥 암울한 내용은 아니다. 그의 퇴장을 대체할 새로운 힘을 꽤 도발적으로 제시한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더 빛나는 눈빛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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