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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반대로 기울어진 운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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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이초희 소비자경제부장]요 몇 년 사이 한국사회는 정치ㆍ역사ㆍ사회적으로 변화무쌍한 시기를 보내고 있다. 수십 년간 이어진 지역주의 정치는 거의 자취를 감췄고, 진보와 보수라는 서구식 정치 역학구도가 이 나라에도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진보와 보수 진영 내부에서도 자본, 계급, 이념에 따라 세부 카테고리가 나뉠만큼 변화의 속도도 빨라지고 있다.


유럽과 미국이 수백 년간 이룩한 변화를 우리는 단 십여년 만에 속성으로 처리하고 있는 셈이다. 한국인 특유의 '빨리빨리'가 사회진화에도 적용되는 것. 빠른 변화는 필연적으로 각 계층간 갈등을 유발한다. 서로가 충격을 완화할 시간적 여유를 가질 수 없어서다. 한국사회가 가장 뜨거운 발걸음을 걷고 있는 시기에 그에 걸맞는 역대급의 갈등은 사회 곳곳에서 터져나온다.

몇 년 전부터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용어가 사회운동가들 사이에서 쓰이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정치권 곳곳에서 표제어로 등장할만큼 유행어가 됐다. 이 말은 원래 축구에서 비롯됐다. 예를 들어 월드컵에서 압도적인 실력을 자랑하는 유럽팀과 경기할 때, 마치 경기장이 기울어진 것처럼 상대국들이 불리하다는 의미로 쓰이는 '스포츠 속담'이다.


지금 한국사회에서도 유사한 의미다. 구조적인 불리함을 떠안고 있거나 소수자, 약자들이 도태되지 않도록 제도적 안전장치를 마련하자는 뜻을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는다'라고 표현한다. 문재인 정부 들어 추진했던 비정규직 문제나 최저임금, 일부 지자체들이 내놓고 있는 주거지원, 청년정책 등이 바로 이런 맥락에서 나온 정책이다.


불공정한 출발점 때문에 정상적 경쟁이 불가능한 구조는 기업들의 세계에서도 존재한다. 압도적인 자본의 차이 때문에 대기업과 중소기업간의 경쟁이 안되는 구조가 대표적이다. 최근에는 한 쪽에만 일방적으로 치우친 법이 공정경쟁을 억눌러 업계를 고사 위기에 빠뜨리는 경우도 있다.

우리나라 대형마트들은 8년 전 만들어진 유통산업발전법 때문에 한 달에 두 번씩은 의무로 휴업을 해야 한다. 본래 취지는 재래시장을 살리자는 것이다. 이른바 기울어진 운동장 이론을 적용한 사례다. 그런데 엉뚱하게 그 틈을 타고 온라인을 기반으로 한 유통 플랫폼들이 가파르게 성장했다.


쿠팡을 앞세운 온라인 마켓들은 빠른 배송, 새벽 배송이라는 가공할 병기로 시장을 급속도로 장악했다. 대형마트들은 녹다운됐다. 이마트는 최근 3년 간 7개 점포가 문을 닫았고, 올해 2분기에는 창사 이래 처음으로 적자를 기록했다. 막강 자본을 앞세운 이마트도 쓱배송을 앞세워 당일 배송을 운영 중이다. 하지만 신생회사 쿠팡에게 밀리고 있다. 왜 일까. 대형마트는 유통산업발전법에 따라 영업을 제한받는 날에는 온라인으로도 물건을 배송할 수 없도록 돼 있기 때문이다.


재래시장을 살리겠다고 만든 법이, 사실은 대형마트와 재래시장을 동시에 죽이면서 온라인 플랫폼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한 환경을 제공하고 있는 셈이다. 그냥 크다는 이유만으로 영업제한을 받은 대형마트들은 온라인까지도 손발이 매인 채 매출 감소라는 직격탄을 맞고 있다. 대형마트들은 배송물류센터를 분사하는 방법 등으로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시작부터 경쟁이 안되는 구조라 만회의 기회는 요원하다.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 잡으려다, 다른 쪽으로 너무 기울어져 버린 것이다.


유통산업발전법이 시행된 지 8년 여가 지났다. 결과는 이미 나와 있다. 한 쪽으로 너무 기울어졌다면 다시 반대 쪽에도 그만큼 레버리지를 줘야 정부가 부르짖는 시장정의가 살아난다. 법을 만든 국회의원들에게 묻고 싶다. "지난 8년 간 재래시장을 몇 번이나 이용하셨습니까?"




이초희 기자 cho77lov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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