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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한 詩]2170년 12월 23일/성윤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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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린 겨울 저녁인데 죽은 자의 글을 따라가는 앳된 소녀가 롤러스케이트 같은 기계를 타고 공중으로 솟구쳤다 거기에 나는 없었다 땅은 좁아졌고 사람들도 줄었다 거기에 나는 없었다 문장도 하늘로 떠올랐다 All's Well That Ends Well 결과가 좋으면 다 좋아요 공중에서 눈이 내렸다 검은 구름에서 흰 눈은 여전했다 거기에 나는 없었다 구름 위를 한 사내가 바바리코트를 입은 채 걷고 있었다 검은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신인류였다 속도 중력 감정 들이 비틀어졌다 우리가 본 것이 아니었다 거기에 나는 없었다 여성과 사내 들은 주로 공중에 떠 있거나 지하로 내려갔다 지상은 오염되었고 신인류는 이제 불행을 매수하지 않았고 내버려 둔 채 세상 최후의 고독을 살았다 거기에 나는 없었지만 이에 대한 어떤 증거도 거기엔 없었다 고스란히 새와 식물 들은 보였지만 불법이긴 했지만 수명 단축 기계가 여기저기 도시의 쓰레기통에 버려져 있었다 '결과가 좋으면 다 좋아요' 그 도시의 재해대책본부에서 쏘아 올린 저녁의 문장이 다시 공중으로 솟구쳤다

신이 아니라, 내가 보기에 그것은 마치 돛대 같았다


[오후 한 詩]2170년 12월 23일/성윤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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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s Well That Ends Well"은 셰익스피어가 쓴 희곡의 제목인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귀족의 아들 버트램을 짝사랑하는 헬레나가 속임수를 써서 즉 버트램이 사랑하는 다이애너와 잠자리를 바꿔치기해서 결국 결혼에 성공한다는 이야기다. 결론만 놓고 보자면 해피엔딩이긴 한데, 결혼에 이르는 과정도 그렇고 극의 다음을 상상해 보면 정말 "결과가 좋으면 다 좋"은 걸까 싶기도 하다. 이 시에 적힌 2170년의 "수명 단축 기계"는 어쩌면 헬레나가 그토록 바라던 결혼 생활의 실재가 아닐까. 물론 나도 시인도 "2170년 12월 23일"엔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2170년 12월 23일"은 이미 우리가 저질러 버린 미래다.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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