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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컬처]‘첫’의 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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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컬처]‘첫’의 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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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운영하는 1인 출판사 정미소는 두 가지 출간 방침을 가지고 있다. 개인의 고백을 응원한다는 것과 되도록 누군가의 첫 책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몸에 새겨진 글을 발견하고 옮겨 적는 데서 도정되고 단단해진다. 그런 그들이 아주 조금씩이나마 세상을 바꾼다고 믿고 있다. 몇 권의 책을 만드는 동안 누군가의 첫 순간을 여러 번 만났다. 다음 주에 나올 ‘체육복을 읽는 아침’의 저자도 처음 책을 낸다. 30대 교사인 그는 책의 가제본을 받고는 설레서 계속 책만 들여다보고 있다고 한다. 그런 그를 보며 나의 몇 년 전, 그 첫 순간이 떠올랐다.


2000년 10월이었다. 열여덟 살이던 나는 광화문 교보문고의 신간 매대에 서서 나의 첫 책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지는 언젠가 나와 교보문고 광화문점에 와서는 "민섭아, 여기에 없는 책은 이 세상에 없는 거야" 하고 말했다. 아버지는 그만큼 엄격한 기준을 가진 사람이었다. 책이 많은 공간이라는 의미에 더해서, 여기에 없는 책은 책이 아니라는 의미도 있었을 것이다. 매대에 놓인 나의 책을 보면서 아버지가 떠오르기도 했고, 작가가 되고 싶다고 PC통신 게시판부터 인터넷 게시판에 이르기까지 계속 글을 쓰던 나의 웅크린 모습이 생각나기도 했다.

열여덟 살 고등학생의 인생에서 가장 고양된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 책의 일러스트는 나의 친구가 그려줬다. 그도 나도 열여덟, 그는 나의 첫사랑이었다. 닮은 게 많았으나 가장 많이 닮은 건 서로의 언어였다고 나는 기억한다. 그와 말하다 보면 늘 말이 겹쳤다. 세상 사람들은 다 말이 닮았나 보다, 하고 가볍게 여겼으나, 그게 참 기적 같은 일인 걸 아주 나중에 알았다. 첫사랑이 그렇고 첫눈이 그렇듯, 그 ‘첫-’이라는 수사는 평생의 기억으로 남는다. 서툴고 애틋하고 그래서 한없이 사랑스러운. 누군가의 첫 책도 그렇다. 그렇게 사랑스럽고 민망한 대상이란 존재하지 않을 듯하다. 모두에게 자랑하고 싶지만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이다. 나는 그 뒤에도 대형서점의 신간 매대에 자주 갔다. 나의 책이 있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좋았고, 누군가가 내 책을 펼쳐 읽기 시작하면 그 곁에서 안절부절못하고 그를 살피곤 했다. 마치 피천득의 소설 ‘은전한닢’의 거지가 된 심정이었다. 저어, 이 책이 괜찮은지 좀 보아주십시오. 그러나 책을 구매하는 사람을 본 일은 없다. 그가 책을 내려놓을 때면 나의 마음도 적당히 구겨진 책처럼 곧 내려앉았다. 대형서점에서 신간 매대를 배회하는 사람은 거기 놓인 어느 책의 저자인지도 모른다.


첫이 주는 설렘이 지나고 나면 어느 순간 잊고 있던 마음 하나가 떠오른다. 내가 왜 이 일을 시작했던 것인가, 하는. 첫 책에는 한 사람이 담아온 언어가 모두 담긴다. 그걸 바탕으로 한발 더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첫 책을 출간할 교사는 앞으로도 교문 앞에서 학생들의 마음을 읽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한다. 체육복을 읽는다는 그 제목은 그가 말한 "제대로 보살핌 받을 수 없어 구겨진 교복을 입고 올 수밖에 없는 학생들은 체육복을 입죠. 그 마음을 읽어주는 게 학생부장인 저의 일이고요"라는 데서 따왔다. 그는 자신의 학생들에게 나누어줄 책갈피를 만들고 있다. 거기엔 이런 말을 적는다. "네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나는 너의 선생님으로 든든히 서 있을게." 그의 고백이 이 세상을 조금 더 나은 데로 데려가길 응원한다. 당신의 어느 첫 순간도 이 세상을 어디론가 견인해내고 있지 않을까.


김민섭 사회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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