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동 대법원.

서울 서초동 대법원.

AD
원본보기 아이콘

[아시아경제 최석진 법조전문기자] 성폭력처벌법상 장애인준강간죄가 성립하기 위해 피해자의 정신적 장애가 반드시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없을 정도에 이르러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정신적인 장애를 가진 피해자가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없거나 행사하기 곤란한 항거불능 또는 항거곤란 상태에 있었는지를 판단할 때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하지 못할 정도인지 여부가 절대적인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의 장애 정도와 함께 다른 여러 사정들을 종합해서 판단해야 된다는 취지의 판결이다.

대법원 2부(주심 민유숙 대법관)는 성폭력처벌법 위반(장애인준강간) 및 간음목적유인 혐의로 기소된 A씨(81)의 상고심에서 검사의 상고를 기각하고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고 23일 밝혔다.


형법상 준강간죄는 폭행 또는 협박을 사용해 사람을 간음하는 강간죄와 달리 완전히 술에 취했거나 깊은 수면 상태에 있는 등 이미 항거불능 상태에 있는 피해자를 간음했을 때 강간한 경우와 똑같이 처벌하는 범죄다.

그리고 성폭력처벌법 제6조 4항은 '신체적인 또는 정신적인 장애로 항거불능 또는 항거곤란 상태에 있음을 이용하여 사람을 간음하거나 추행한 사람은 1항부터 3항까지의 예에 따라 처벌한다'고 규정, 신체적 또는 정신적인 장애가 있는 사람에 대한 준강간죄를 가중처벌하고 있다.


A씨는 2018년 무료급식소에서 알게 된 지적장애 3급인 B씨(48·여)를 이듬해 2월 19일부터 28일까지 모두 5차례에 걸쳐 자신의 집으로 유인해 간음한 혐의로 기소됐다.


초등학교 졸업 이후 추가교육이나 사회생활 경험을 갖지 못했던 B씨는 결혼해 딸을 출산했지만 곧 이혼한 뒤 딸을 떠나 보내고 역시 지적장애 3급 장애인인 남동생과 함께 살면서 기초생활수급비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A씨는 범행 때마다 "우리 집에 가서 청소 좀 하자"며 B씨를 유인해 자신의 집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실제 B씨에게 청소를 시키고 수고비로 1만~3만원을 준 뒤 간음했다.


검찰은 B씨가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등 정상적인 사고가 곤란하다는 것을 이용해 A씨가 자신의 집으로 유인, 간음했다고 보고 A씨를 재판에 넘겼다.


앞서 1심은 A씨에게 성폭력처벌법상 장애인준강간죄와 형법상 간음유인죄가 모두 성립한다고 보고 징역 4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또 A씨에게 80시간의 성폭력 치료프로그램 이수명령도 함께 내렸다.


재판부는 "피해자는 이 사건 각 범행 당시 지적장애로 인해 의사소통 능력이나 사회적인 생활 능력, 일상생활에서의 문제해결 능력이나 판단력 등이 부족한 상태였고, 이로 인해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하거나 의사에 반하는 성관계에 대해 저항 또는 거부의 의사표시를 하는 것이 현저히 곤란한 상태에 있었으며, 피고인 또한 피해자가 이러한 상태에 있었음을 인식하고 있었음이 충분히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2심에서 결과가 뒤집혔다. 2심 재판부는 A씨의 항소를 받아들여 1심 판결을 파기하고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피해자 B씨가 장애인으로서 성적 자기결정권을 완전히 주체적으로 행사하기에는 다소 미약한 상태에 있었다는 점은 인정된다"면서도 "장애인준강간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피해자의 정신적인 장애가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하지 못할 정도에 이르러야 하는데 이 사건 당시 피해자의 정신적인 장애 상태가 그에 이르지 못했다"고 이유를 밝혔다.


이어 "설령 피해자에게 그러한 정도의 정신장애가 있다 하더라도 피고인은 이를 인식하지 못했으므로, 피고인이 이 사건 각 공소사실 기재와 같이 피해자와 성관계를 한 것은 장애인준강간죄가 될 수 없다"고 덧붙였다.


즉 ▲성폭력처벌법상 장애인준강간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피해자의 정신적인 장애 정도가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하지 못할 정도'에 이르러야 하는데 B씨의 경우 그렇지 않았고 ▲A씨에게 B씨가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하지 못할 정도'의 정신적인 장애가 있다는 점에 대한 고의가 없었다는 판단이었다.


재판부는 간음유인 혐의 역시 무죄로 판단했다.


재판부는 ▲A씨가 사실은 성관계를 할 목적이었지만 이를 숨기고 자신의 집을 청소해달라고 B씨를 유인했다는 게 공소사실이지만, B씨가 실제로 A씨의 집을 청소했고 매번 1만~3만원의 돈까지 받은 점 ▲B씨가 최초 경찰에 신고한 이후에도 3차례나 더 A씨의 집에 갔던 점 ▲A씨가 B씨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는 과정에서 어떠한 강제력이나 위협적인 말 또는 행동, 피해자를 현혹할 만한 기망행위나 감언이설 등을 한 정황이 없고 오히려 두 사람 사이에 친분·호감 내지 신뢰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점 ▲B씨는 A씨의 집에서 라면을 먹기도 하고, A씨와 상당한 대화를 나누며 성관계를 했는데 그 과정에서 자신의 의사에 따라 언제든지 그 곳을 이탈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여 A씨가 B씨를 자기의 물리적·실력적 지배 아래 뒀다고 평가하기도 어려운 점 등을 근거로 들었다.


대법원은 A씨에게 무죄를 선고한 2심 판결의 결론은 옳다고 봤다. 하지만 장애인준강간죄가 성립하기 위한 '정신적 장애'에 대한 2심의 판단은 틀렸다고 봤다.


재판부는 "피해자가 피고인을 상대로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없거나 행사하기 곤란한 항거불능 또는 항거곤란 상태에 있었는지 여부는 피해자의 장애 정도와 함께 다른 여러 사정들을 종합해 범행 당시를 기준으로 판단해야 하는 것"이라며 "피해자의 장애가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하지 못할 정도인지 여부가 절대적인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니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리고 이를 판단함에 있어서는 장애와 관련된 피해자의 상태는 개인별로 그 모습과 정도에 차이가 있다는 점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해당 피해자의 상태를 충분히 고려해야 하고 비장애인의 시각과 기준에서 피해자의 상태를 판단해 '장애로 인한 항거불능 또는 항거곤란 상태'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쉽게 단정해서는 안 된다"고 덧붙였다.


즉 피해자의 정신적 장애 정도가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없을 정도에 이르지 못한 경우라도 다른 여러 사정들을 종합해 장애인준강간죄가 성립할 수 있다는 취지다.


이 같은 전제에서 재판부는 "피해자는 성폭력처벌법 제6조 4항에서 말하는 '정신적인 장애'를 가진 사람으로서 이 사건 당시 정신적인 장애가 주된 원인이 돼 원하지 않는 피고인과의 성관계에 대해 성적 자기결정권을 제대로 표현·행사하지 못하는 상태, 즉 반항이 불가능하거나 곤란한 상태에 있었다고 인정할 수 있다"며 "따라서 이를 인정할 수 없다고 판단한 원심판결에는 성폭력처벌법 제6조 4항의 '정신적인 장애로 항거불능 또는 항거곤란 상태'에 관한 법리오해의 위법이 있다"고 지적했다.


다만 재판부는 "피고인으로서는 피해자가 장애로 인해 항거불능 또는 항거곤란 상태에 있었음을 인식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이므로, 이 점에 대한 검사의 증명이 부족하다고 판단되고, 따라서 이 부분 공소사실을 무죄로 판단한 원심판결은 결과적으로 수긍할 수 있다"고 상고기각의 이유를 밝혔다.


2심 재판부가 B씨가 사건 당시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하지 못할 정도의 정신적인 장애 상태는 아니었다는 이유로 장애인준강간죄 무죄를 선고한 것은 잘못됐지만, A씨의 고의에 대한 검사의 입증이 부족해 결론적으로 무죄라는 판단이다.


재판부는 간음유인 혐의에 대해서도 "원심판결의 이 부분 이유설시에 부적절한 부분은 있으나, 위와 같은 원심의 판단에 논리와 경험의 법칙을 위반해 자유심증주의의 한계를 벗어나거나 관련 법리를 오해해 판결에 영향을 미친 잘못이 없다"고 밝혔다.

AD

대법원 관계자는 "성폭력처벌법상 정신적인 장애가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하지 못할 정도의 장애'로 제한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해 하급심의 혼란을 해소하는 한편, '정신적인 장애로 항거불능 또는 항거곤란 상태'였는지 여부는 피고인과의 관계에서 그 당시 상황을 기준으로 장애의 정도와 함께 여러 가지 사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서 판단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향후 유사한 사건의 판단에 지침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이번 판결의 의의를 밝혔다.


최석진 법조전문기자 csj0404@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함께 보면 좋은 기사

새로보기

내 안의 인사이트 깨우기

취향저격 맞춤뉴스

많이 본 뉴스

당신을 위한 추천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