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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의 복 받은 땅, 경복궁 후원 베일 벗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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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부터 조선까지 임금의 놀이터
서현정·오운각 일제 침략으로 소실
경복궁 복원사업에 후원 포함될 수도
훼손된 역사성 회복의 길 밟을 듯

관저 인근에는 청와대가 오래전부터 명당으로 인식됐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천하제일복지' 각석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복된 땅이라는 뜻이다.

관저 인근에는 청와대가 오래전부터 명당으로 인식됐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천하제일복지' 각석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복된 땅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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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2월 청와대 경내 수풀 속에서 표석이 발견됐다. 화강암을 깎아 만든 가로 250㎝, 세로 120㎝ 크기의 각석(刻石)이었다. ‘천하제일복지(天下第一福地)’라는 글씨가 해서체로 쓰여 있었다. 천하에서 제일가는 복 받은 땅이라는 의미다. 청와대는 금석학 대가 임창순 옹을 모셔다 감정을 부탁했다. 임 옹은 300~400년 전에 제작됐다고 결론을 내렸다.


청와대 자리가 명당이라는 이야기는 오래전부터 있었다. 고려 문종과 숙종은 이궁(離宮)을 지었다. 조선 세종은 경복궁 후원으로 조성했다. 당시 건립된 서현정, 취로정, 관저전, 충순당 등은 임진왜란 때 소실됐다. 고종은 창덕궁 후원을 본떠 복원에 나섰다. 현 상춘재와 녹지원 인근에 융문당과 융무당을 만들어 무과 시험장 등으로 활용했다. 현 영빈관 인근에는 풍년을 기원하는 뜻에서 논밭인 팔도배미와 재당인 경농재를 조성했다.

고종은 현 관저 인근에 사적 공간인 오운각, 옥련정 등도 마련했다. 천하제일복지 각자가 확인된 자리 근처다. 실체는 명확히 파악되지 않는다. 하나같이 일제강점기에 사라졌다. 바로 앞에 대통령 관저가 위치해 현장조사도 불가했다. 조성 목적을 추정할 사료마저 부족해 복원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비교 대상에 근거한 추측만 가능했다. 창덕궁 후원 북쪽에 마련된 옥류천이다. 임금의 사적 영역이었던 만큼 유사하게 활용됐다고 여겨진다.


관저 입구에 있는 계단을 따라 5분 정도 오르면 오운정이 나온다. 경복궁 후원에 지었던 오운각의 이름을 딴 서울시 유형문화재다.

관저 입구에 있는 계단을 따라 5분 정도 오르면 오운정이 나온다. 경복궁 후원에 지었던 오운각의 이름을 딴 서울시 유형문화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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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통점은 많은 편이다. 오운각, 옥련정 등은 옥류천의 건물들처럼 주어진 입지조건에 맞춰 조성됐다. 옥련정은 서울 경관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높은 언덕에 자리했다. 옥류천 폭포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마련된 창덕궁 소요정과 흡사하다. 천하제일복지 각자 아래와 대통령 관저 뒤쪽 사이에 흐르는 천하제일복지천은 유배거(流盃渠·인공적으로 물길을 파서 만든 도랑) 기능을 모방한 듯 보인다. 옥류천에서 확인되는 유상곡수(流觴曲水) 흔적을 연상케 한다. 오운각이 사람이 묵을 수 있도록 조영된 점 또한 창덕궁 농산정과 비슷하다.


궁궐 안에 후원이 조성된 건 임금의 행동반경이 좁아서다. 궁궐은 임금에게 저택이자 집무실이다. 신하들은 비용, 준비, 보안 등을 이유로 궁 밖 출입을 반기지 않았다. 여가 활동은 궁궐 안에서 해결해야 했다. 임금은 일상이 여러 사람에게 노출돼 있었다. 가까운 곳에 마음 놓고 쉴 공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마련한 공간이 후원이다. 잠시나마 궁궐 뒤편의 숲을 거닐며 머리를 식히거나 내면을 성찰할 수 있었다.

이마저도 이목과 규율에 얽매인다고 생각한 임금이 있다. 반정으로 왕위에 올라 삼전도 굴욕을 겪은 인조다. 마음껏 유희 생활을 즐기려고 용지(龍地)라는 연못을 팠으나 안 좋은 소문이 퍼졌다. 그는 더 멀리 떨어지고 외진 곳을 찾아 후원을 조성했다. 그곳이 바로 옥류천이다.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사적 공간이자 놀이터로 애용했다.


침류각은 팔작지붕을 갖춘 1900년대 초기 건물이다. 주변에 메타세쿼이아 세 그루와 낙우송 일곱 그루가 모여 있다. 하나같이 20m가 넘는 높이로 수려한 풍광을 자아낸다.

침류각은 팔작지붕을 갖춘 1900년대 초기 건물이다. 주변에 메타세쿼이아 세 그루와 낙우송 일곱 그루가 모여 있다. 하나같이 20m가 넘는 높이로 수려한 풍광을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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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을 사적 공간으로 규정할 수는 없다. 군사와 농경 시설이 함께 마련됐기 때문이다. 용어의 개념이 그만큼 포괄적이다. 일각에선 별서(別墅)로 지칭하자고 한다. 뜻은 본제(本第)와 인접한 정승지나 전원지에 있는 휴양 목적 또는 빈객을 위한 장소다. 후원은 어디까지나 궁궐을 둘러싼 성벽 안에 존재하는 공간이다. 궁궐 내부에 ‘제2의 주택’ 또는 ‘전원생활의 터전’이란 있을 수 없다.


조선 궁궐 후원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정우진 상명대 한중문화정보연구소 연구원은 논문 ‘중건 경복궁 후원 오운각 권역으로 조명한 조선 시대 궁궐 별원의 특성’에 ‘별원(別苑)’이라는 말을 썼다. ‘구별함’, ‘따로’, ‘별도의’, ‘떨어짐’을 뜻하는 ‘별’의 자의(字義)와 후원을 의미하는 ‘원’을 합성했다. 사전상 정의나 사료상 용례를 따지지 않더라도 ‘동떨어진 정원’이라는 의미를 연상케 한다고 설파했다.


"별원은 대내의 공간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고 후원 중에서도 깊숙이 들어가야 하는 입지 특성이 보다 부각되어야 한다고 판단된다. 이용 측면에서 살펴보면, 많은 임금이 이곳 별원에서 차분히 사색하며 유식의 행위를 했을 테지만, 어떤 임금은 오락을 위한 놀이터로 또는 신하들과 화합하는 장소로 활용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청와대 관람을 신청한 인원은 404만 명이다. 지난달 27일부터 신청을 받아 25만명 정도만 관람했다. 대통령실은 6월 11일 이후 상시 개방을 검토하고 있다.

지금까지 청와대 관람을 신청한 인원은 404만 명이다. 지난달 27일부터 신청을 받아 25만명 정도만 관람했다. 대통령실은 6월 11일 이후 상시 개방을 검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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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을 조성한 방식이나 공간 구성 등은 베일에 싸여 있다. 옥류천과의 상동성(相同性) 또한 실제 지형 측정 등 정밀조사가 요구된다. 정 연구원은 "건물의 정확한 위치와 변화 이력, 수계 및 원지형의 판단 그리고 건물지로 대표되는 주요 조망에서 경관 향유방식을 추출해 보는 연구가 필요하다"고 했다. 이는 외세침탈 극복과 역사성 회복이라는 상징성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일제강점기 경복궁 후원에는 일본 총독 관저가 들어섰다. 광복 뒤 청와대가 건립됐으나 여전히 일제 잔재가 남아있다고 평가된다.


지난 10일 청와대 개방으로 조사 및 발굴 여지는 커졌다. 경복궁 복원 사업에 후원이 포함될 수도 있다. 실제로 윤석열 정부는 국정과제에 내년부터 2026년까지 청와대 핵심 유적을 발굴하고 복원·정비한다는 계획을 포함했다. 훼손된 경복궁 후원의 역사성을 회복해 세계적 역사·문화공간으로 만들겠다는 내용이다.


사실상 관리를 떠안은 문화재청은 어떻게 활용할지를 두고 고심한다. 아직 청와대 전체를 사적으로 지정할지, 근대역사문화공간으로 등록할지조차 정하지 않았다. 전자로 이어진다면 경복궁 후원의 역사성을 회복하는 방안에 무게가 실릴 전망이다. 후자의 경우에는 청와대가 현대 정치사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데 초점이 맞춰진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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