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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윤증현 재정부 장관의 추석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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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는 역사의 한복판에 서있습니다

[아시아경제 박연미 기자] 사랑하는 기획재정부 직원 여러분
G20 정상회의 의제를 조율하기위해 18일 출국합니다.
해외로 출장갈 때마다 드는 고민인데, “외국인에게 한국을 어떻게 설명하면 가장 폼이 날까”를 생각하곤 합니다.

쉽고 간결하면서도 강렬하게 기억될 몇 글자 말입니다.
귀에 쏙 들어오고, 입에 착 감기는 표현이라면 더 좋겠지요.
00전자나 00자동차의 나라?
드라마 대장금?
월드컵 길거리 응원?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경제부처에 있어서인지 요즘 저는 “원조받던 나라가 원조하는 나라로 일어선 유일한 사례”라는 표현이 가장 맘에 듭니다.
외국 길거리에서 아무나 붙들고 막 자랑하고 싶습니다.
이 생각만 하면 목에 힘이 들어가고 입이 근질거립니다.

직원 여러분
그렇지만 이 말은 사실 우리가 국제사회에 빚진 게 많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실제 국제사회의 한국 원조는 학교급식용 밀가루나 옥수수가루를 넘어 다양하고 밀도있게 진행됐습니다.
6.25 직후 UN이 운영한 ‘한국 재건단’(UNKRA)은 물고기 잡는 법도 가르쳤더군요.
대표적인게 수산장(授産場)입니다.
생선 파는 시장이 아니라 “전쟁 미망인의 경제적 자립을 돕기위해 UN이 국내 수십곳에 설치한 봉제기술 교육장”을 말합니다.

옷감 짜는 기계와 재봉틀이 있었죠. ‘전쟁 미망인 직업훈련소’ 정도로 풀이할 수 있겠군요.
또한 집도 원조받은 돈으로 건설하다보니 ‘차관아파트’라는게 생겼고, 교육도 마찬가지여서 아이들 교과서도 재건단 도움으로 인쇄했고, 국립서울대도 세계은행의 유상원조로 지었습니다.

국제사회에서 받은 이런 도움을 제대로 갚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요?
저는 KSP사업 못지않게 ‘G20 정상회의의 성공적 개최’가 정답이라고 생각합니다.
G20 회의에서 금융안전망 구축, 국제금융기구 개혁, 균형 성장, 빈곤 퇴치 등에 대한 합의를 성공적으로 도출하고, 추진동력을 만들어내는 것이야말로 세계경제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담보하는 일일테니까요. 특히 개발 의제에서는 한국의 경제발전경험이 많은 개도국들에게 내비게이션이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실제 며칠전 한-아프리카 경제협력회의에서 아프리카 장차관들이 제게 가장 많이 던진 질문이 “우리도 한국처럼 될 수 있냐?”는 것이었으니까요.

물론 많은 의제 중 어느 의제 하나 쉬운 것이 없고, 이해가 충돌하지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오늘 못하면 내일로 미뤄도 되는’ 그런 일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래서 지구 한 바퀴를 도는 여정을 마련했습니다.
쉽지않은 여정이겠지만 제가 여러분과 함께 가고, 앞장서 가고, 북돋우며 가겠습니다.
그리고 지금 첫발을 내딛습니다.

기획재정부 직원 여러분
아울러 최근 새로운 국정기조로 제시된 ‘공정사회’를 어떤 경제정책과제로 구현하고, 어떻게 실행력을 확보할 것인지 깊이 있게 고민해 줄 것을 당부합니다.
사실 공정사회를 너무 추상적 개념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억울하면 출세하라”, “백(back)이 좌우한다” “팔이 안으로 굽지” 같은 말들이 마치 근사한 처세술처럼 통용되는 우리사회의 모습에서 공정사회의 시급성을 봅니다. 더구나 경쟁의 패자들마저 이런 불공정성을 내면화해 “이번에는 백(back)이 약해서 입찰에 떨어졌으니 다음에는 더 센 줄을 잡아야지”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는 사회, 부끄럽지만 이게 우리사회의 자화상입니다.
“기회가 균등하게 주어지고, 경쟁의 룰과 과정이 공정하고, 패자를 부축하는” 공정사회는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Trust』에서 말한 바로 그 사회적 자본에 해당됩니다. 천연자원, 인적자원, 원천기술, 금융자본 보다 더 중요한 자본, 선진경제로 도약하기 위해 반드시 갖추어야할 자본, 그 자본이 바로 사회적 자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나무는 힘든 건기(乾期)에 물을 찾아 땅속으로 깊숙이 뿌리를 내린다고 합니다. 바로 그렇게 뿌리를 깊게 내린 나무는 태풍 곤파스에도 뽑히지 않는 것입니다. 경제위기로 어려울 때일수록 경제체질을 바꾸고 사회적 자본을 형성해놓으면, 경제패권의 대전환기에서 그만큼 우리나라의 역할과 지위가 강화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기획재정부 직원 여러분
곧 추석입니다.
마음이 넉넉해야할 절기입니다.
그러나 취약계층이 느낄 먹고살기의 고단함, 특히 미취업자나 실직자가 느낄 암담함을 생각하면 송구한 마음입니다.
우리가 마련한 세제개편안, 고용대책, 예산안 등이 취약계층의 팍팍한 삶에 작은 희망이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어제 아침 우리부 직원들이 새벽인력시장에 나가 일용직 근로자분들과 송편을 나누어 먹었다고 들었는데, 각 분야에서 이런 만남을 정례화 해줄 것을 당부합니다.

추석이 다가오니 고(故) 김진선 과장이 생각납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아마 마음 속 상복(喪服)을 쉽게 벗지 못할 것 같습니다.

야근과 주말근무가 일상화되다보니 “건강 챙기라”는 말을 하기도 민망합니다.

그래도 환절기 건강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잘 다녀오겠습니다.

2010.9.17
윤증현 드림




박연미 기자 ch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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