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Dim영역

[잣나무골편지]여름 한복판에서

스크랩 글자크기

글자크기 설정

닫기
인쇄 RSS
[아시아경제 이규성 기자]여름이 깊었다. 올해는 그 흔한 매미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우기(雨期)가 시작되면서 밤에 우는 풀벌레들도 사라졌다. 잣나무골은 간혹 천둥과 번개에 휩싸였다. 아이들은 자다깨서 내 품으로 뛰어든다. 그 때마다 이 세상에 우리 가족만이 남아 있는 듯한 착각이 밀려든다.

토요일 내내 집안에 갇혀 있다가 비가 잦아든 일요일 텃밭에 나왔다. 상추잎들이 녹아내리고, 배추가 썩었다. 은근한 썩은 채소 비린내. 그에 비해 선명하게 무성한 풀들… 여름 한복판에서 나와 풀은 쫓고 쫓긴다. 경쟁이 정점에 달한 것이다. 장마가 한창일 때쯤 풀들은 왜 그리 극성인지… 그들의 생명력이 경외롭다.
봄부터 풀과 나는 쫓고 쫓기는 시간을 반복해 왔다. 마당의 풀만해도 벌써 두 차례 제거했다. 텃밭은 세번째. 배수로와 집 뒤꼍은 한번… 주말을 쏟아 붓고도 풀들이 자라는 시간을 쫓을 수 없다.

마당에는 바랭이가, 텃밭에는 쇠스랑과 비름이 점령해가고 있다. 요즘은 자리공 같은 외국산 풀들마저 극성이다. 텃밭가에는 달맞이꽃들이 한창이다. 아직 벙글지 않아 노란 꽃잎을 보기는 이르다.

이미 잣나무골 아래엔 달맞이꽃들이 피었다 지기를 반복했을 터다. 저녁 무렵 산책길에 살펴보기로 하고, 잡초제거에 열중했다. 풀 한 포기 뽑혀 나올 때마다 지렁이 두세마리가 딸려 나온다. 딱딱한 마당조차 지렁이밭이다. 호미 끝에 찍혀 몸통이 두 동강난 지렁이들이 꿈틀댄다. 오랫동안 잣나무골에는 농약을 치는 이들이 없어 땅 밑은 지렁이들의 서식처가 됐다.
고구마밭에서 넝쿨을 제치며 잡초를 뽑고 있으려니 아내가 다가왔다. 그녀는 휴가철에 보낼 제주도에서의 계획을 설명한다. 우리 가족은 제주도에는 첫 여행이다. 아내는 며칠째 인터넷을 뒤지며 신이 났다. 오름과 올레길, 마라도는 꼭 보자고 한다. 나는 얘기를 들으며 밭매기에 열중했다. 그런데 아내가 갑자기 비명을 지른다. 바로 내 무릎 밑에 독사 한마리가 혀를 낼름거리고 있다. 다행히 아내가 먼저 발견했다. 우중충한 회색 독사가 나를 노려본다.

나는 뱀을 잡아 숲에 던졌다.
"다시는 경계를 넘지 말거라. 네가 사는 숲으로 돌아가라"

뱀을 보고는 도무지 일할 맛이 나지 않는다. 겁도 났다. 샘에 가서 간단히 씻은 후 양평장에나 가자고 아내와 아이들을 꼬드겼다. 양평장은 3, 8일날 열린다. 더운 날에도 시장은 활기가 넘쳤다. 비 개운 다음이라서 그런가. 사람들도 북적였다. 국수집, 보리밥집. 즉석에서 만드는 두부집, 녹두빈대떡집 그대로다. 낯익은 장돌뱅이들도 보인다.

분주한 난전 사이를 어슬렁 어슬렁 슬리퍼와 반바지 차림으로 돌아다녔다. 한가로운 사람은 우리 가족뿐인 것 같다. 돼지 족발집에도 들렀다. 그새 꽁지머리 할아버지가 보이지 않는다. 족발집은 할아버지와 40대 아들이 운영한다. 나는 10여년째 단골이다.

"할아버지는 보이지 않네요 ?"
"여기 오시는게 꽤 되신가 봐요. 작년말에 그만 두셨어요. 그냥 전수리집에 계세요."
"어디 아파신가요 ?"
"그런 건 아니고, 힘드시다고… 쉬는데도 바쁘세요."

족발집 장돌뱅이 할아버지가 은퇴를 한 것이다. 족발집은 양평장에서 인기 있는 집중의 하나다. 언제나 사람들이 북적이고, 좌판에 막걸리를 마시는 사람들도 가득 차 있다. 족발을 사고 난 후 창포묵, 닭발 등을 좀 더 샀다. 그리고 장 가운데 빈대떡집에 이르러 목수일 하는 장심리 친구를 만났다. 용문산 사나사 계곡에 가려고 먹거리를 샀단다. 마침 잘 됐다 싶어 우리 가족도 따라 나섰다.

"캬!! 제맛이다."
더운 여름날, 계곡에서 마시는 막걸리 맛은 일품이다. 나는 지난해부터 막걸리 예찬자가 됐다. 삶이 고단할수록, 일이 힘들수록 막걸리 맛은 깊어지니. 참 별스런 맛이다. 거기에 시큼 털털, 쌉쌀, 떨떠름하고도 달달함이 더해진 것이라니... 그 맛은 온갖 간난신고를 겪어온 아버지들이 '우리'를 바라볼 때처럼 그윽하다.

"너희가 사는 세상은 우리하고 달라야한다. 더 넓고 큰 데로 가서 살아라."
"빚 지지마라. 누구한테 손 벌릴 생각은 죽어도 하지마라…"

한 아이가 시오리 되는 주막에 가서 막걸리를 받아오다 목말라 홀짝거린다. 아이는 그만 취해서 비틀거린다. 아이는 술 몇 모금에 휘청거리느라 주전자의 술이 절반이나 쏟아지는 줄도 모른다.

그렇게 처음 술을 배운 어린 아이가 계곡에 앉아 다시 술을 마신다.
"아버지 갑자기 몸에 열 나네…" 어쩌구 하며 도랑에 처박혔던 우리들…ㅋㅋㅋㅋ 그 작은 도랑을 기어 나오다 미끄러지고 또 미끄러지던 기억… 생각 안 나나?

"저 놈 술 취했군 !!" 논두렁에서 새참 먹던 어른들의 호탕한 웃음이 가뭇하다. '술 취한 게 많이도 겁났었지 !'

일손 놓고 이웃 친구와 계곡에서 취한 어느 날이 호사롭다. "산다는 게 항상 어긋나는 것만이 아니구나…" 뱀 핑계 삼아 친구도 만나고 하루를 신나게 놀았으니… 굳이 나쁠 것이 없다.



이규성 기자 peace@
<ⓒ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AD

함께 본 뉴스

새로보기

이슈 PICK

  • "편파방송으로 명예훼손" 어트랙트, SBS '그알' 제작진 고소 강릉 해안도로에 정체모를 빨간색 외제차…"여기서 사진 찍으라고?" ‘하이브 막내딸’ 아일릿, K팝 최초 데뷔곡 빌보드 핫 100 진입

    #국내이슈

  • "푸바오 잘 지내요" 영상 또 공개…공식 데뷔 빨라지나 대학 나온 미모의 26세 女 "돼지 키우며 월 114만원 벌지만 행복" '세상에 없는' 미모 뽑는다…세계 최초로 열리는 AI 미인대회

    #해외이슈

  • [포토] '그날의 기억' [이미지 다이어리] 그곳에 목련이 필 줄 알았다. [포토] 황사 극심, 뿌연 도심

    #포토PICK

  • 매끈한 뒷태로 600㎞ 달린다…쿠페형 폴스타4 6월 출시 마지막 V10 내연기관 람보르기니…'우라칸STJ' 출시 게걸음 주행하고 제자리 도는 車, 국내 첫선

    #CAR라이프

  • [뉴스속 용어]'비흡연 세대 법'으로 들끓는 영국 사회 [뉴스속 용어]'법사위원장'이 뭐길래…여야 쟁탈전 개막 [뉴스속 용어]韓 출산율 쇼크 부른 ‘차일드 페널티’

    #뉴스속OO

간격처리를 위한 class

많이 본 뉴스 !가장 많이 읽힌 뉴스를 제공합니다. 집계 기준에 따라 최대 3일 전 기사까지 제공될 수 있습니다.

top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