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Dim영역

[빵굽는 타자기] '여의도 문법'을 깨기 위해, 기꺼이 낯선 목소리를 내겠다

뉴스듣기 스크랩 글자크기

글자크기 설정

닫기
인쇄 RSS

[아시아경제 박준이 기자] 대한민국의 입법 기관인 국회의사당에는 '여의도 문법'이라는 오래된 말이 있다. 흔히 여의도 정치인들이 사용하는 언어와 관례를 일컫는 말로, 뚜렷한 원칙이나 실체는 없다. 경험과 선수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정치판에 익숙해지다보면 자연스레 얻게 되는 훈장인 셈이다. 그러나 여의도 문법을 익히지 못하면 '그들만의 리그'에서 배척되고 도태되기 십상이다.


이 책의 저자인 박지현 전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은 여의도 문법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는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을 세상에 폭로한 '추적단 불꽃' 출신으로, 지난해 1월 대선을 앞두고 더불어민주당 선거 캠프에 '디지털 성범죄 근절 특별위원장'이라는 직책으로 영입된다. 이어 대선 직후인 3월에는 당 공동비대위원장으로 발탁되기까지 한다. 선거 전략을 위한 '반짝 영입'이었지만, 어찌됐든 여의도 내에선 흔치 않은 20대이자 여성인 정치인이 당의 한중심에 진입하게 된 것이다.

책에는 정치 신인이었던 저자가 82일간 당의 중역으로 활동하며 바라본 여의도 정치의 뒷이야기가 담겨 있다. 익명의 사회운동가이자 청년이었던 그가 하루아침에 정치인이 된 과정은 한편의 드라마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현실은 결코 드라마 같지 않았다. 공천 과정에서 부동산 정책 실패의 책임을 이유로 전 정권 출신 인사의 출마를 반대하자 지도부의 거센 반발을 직면해야 했고, 성폭력·성희롱 사건에 연루된 당 의원들을 원칙대로 처리해야 한다고 밝힌 후에는 강성팬덤의 공격이 이어졌다고 한다.

[빵굽는 타자기] '여의도 문법'을 깨기 위해, 기꺼이 낯선 목소리를 내겠다
AD
원본보기 아이콘

당시 상황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반성과 혁신을 하라고 비대위원장으로 들어온 것인데, 그 활동을 하지 말라는 말과도 같았다." 결국 그는 당의 부름을 받았지만, 어느 하나 쉽게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국회에서 요구되는 여의도 문법이란 586과 남성 중심의 정치인들이 쥐고 있는 권력을 따르는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당 지도부와 계속해서 갈등을 빚는 저자의 모습은 한편으론 '서툴다'고 비춰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어느 곳보다 변화가 느린 정치권에 등장한 낯선 목소리는 그 자체로 충분한 의미를 지닌다. 청년 정치인 한 명이 당의 반성과 변화를 이끌어내진 못할지라도, 기성 정치인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기존의 관례를 지키지 못한다는 이유로, 강성 당원들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당이 똑같은 사람들의 목소리만을 받아들인다면 여의도 정치의 변화는 요원해질 것이다. 이는 다양한 연령, 시대, 지역의 민의를 대변해야 하는 입법 기관으로서의 역할을 하기도 어렵게 만든다.


결국 '586 세대'와 '거대 양당'만을 대변하는 지금의 정치가 변화하려면 낯선 목소리가 계속해서 유입돼야 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힘들어도 정치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한다. "내가 좀 더 버텨야 한다. 꿋꿋하게 버티고 우뚝 서야 그만큼 내 목소리의 진심을 이해하는 이들이 더 많아질 것이라고 믿는다." 단단한 기득권을 깨기 위해 부딪히는 이들, 그리고 변화에 목소리를 보태주는 이들이 늘어난다면 우리 정치 역시 조금씩 모습을 달리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저자의 약 세달 간의 정치 도전기는 막을 내리고, 그는 수많은 청년 정치인들과 다를 바 없이 여의도 바깥에 서게 됐다. 그런 그가 앞으로 여의도 문법에 적응하고야 말지, 자신만의 모습으로 기득권이라는 바위를 깨는 데 성공할 지는 알 수 없다. 앞으로의 국회는 변화할 수 있을까. 그 실마리가 이 책에 담겨 있다.


이상한 나라의 박지현 | 박지현 | 저상버스 | 276쪽 | 15,300원




박준이 기자 giver@asiae.co.kr
AD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함께 본 뉴스

새로보기

이슈 PICK

  • 하이브-민희진 갈등에도…'컴백' 뉴진스 새 앨범 재킷 공개 6년 만에 솔로 데뷔…(여자)아이들 우기, 앨범 선주문 50만장 "편파방송으로 명예훼손" 어트랙트, SBS '그알' 제작진 고소

    #국내이슈

  • 때리고 던지고 휘두르고…난민 12명 뉴욕 한복판서 집단 난투극 美대학 ‘친팔 시위’ 격화…네타냐후 “반유대주의 폭동” "죽음이 아니라 자유 위한 것"…전신마비 변호사 페루서 첫 안락사

    #해외이슈

  • [포토] '벌써 여름?' [포토] 정교한 3D 프린팅의 세계 [포토] '그날의 기억'

    #포토PICK

  • 신형 GV70 내달 출시…부분변경 디자인 공개 제네시스, 中서 '고성능 G80 EV 콘셉트카' 세계 최초 공개 "쓰임새는 고객이 정한다" 현대차가 제시하는 미래 상용차 미리보니

    #CAR라이프

  • [뉴스속 인물]하이브에 반기 든 '뉴진스의 엄마' 민희진 [뉴스속 용어]뉴스페이스 신호탄, '초소형 군집위성' [뉴스속 용어]日 정치인 '야스쿠니신사' 집단 참배…한·중 항의

    #뉴스속OO

간격처리를 위한 class

많이 본 뉴스 !가장 많이 읽힌 뉴스를 제공합니다. 집계 기준에 따라 최대 3일 전 기사까지 제공될 수 있습니다.

top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