尹 당선인 노동 공약에 IT 노동자들 촉각
'노동 유연화' 예고…"주 120시간" 언급도
"크런치 돌아올 수도 있다" 개발자들 우려
전문가 "韓 일터, 불법 연장근로 여전히 많아"
"우선 장시간 불법노동 못하게 막아야"

23일 오전 서울 가산디지털산업단지역 인근 출근길. /  사진=임주형 기자 skepped@

23일 오전 서울 가산디지털산업단지역 인근 출근길. / 사진=임주형 기자 skepp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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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임주형 기자] "1주일에 120시간 근무요? 솔직히 얼마를 주더라도 자신이 없네요."


서울 '가산디지털산업단지'에서 23일 만난 20대 직장인 A 씨는 '주 120시간 근로를 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 난색을 표했다.

금천구부터 구로구까지 걸쳐 있는 가산디지털산업단지의 근로자들이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일부 노동 유연화 공약에 대해 우려를 표하고 있다.


직원수 5~50인 이하의 중소기업들이 몰려 있는 이곳은 정부의 노동 규제 변화에 매우 민감한 편이다. 특히 정보통신(IT) 산업에 종사하는 이들은 과로가 일상적이던 과거의 기업 문화가 부활하는 게 아니냐는 걱정을 토로했다.

지난 1965년 첫 삽을 뜬 가산디지털산업단지는 이제 국내를 대표하는 IT 산업 단지 중 하나다. 금천구에 따르면 이곳은 총면적 약 60만평에 육박하며, 이 가운데 73.9%는 사무실, 공장, 물류센터 등 산업시설이다. 입주한 기업체는 1만1888개사에 달하며, 그중에서도 IT 기업이 가장 많다.


국내 대표적인 IT 대기업들이 입주한 판교, 광교 테크노밸리와 달리 가산은 수많은 소규모 기업들이 몰려 있는 게 특징이며, 산업 분야도 IT 아웃소싱부터 콘텐츠까지 매우 다양하다.


이곳의 한 콘텐츠 기업에서 편집용 소프트웨어를 다룬다는 A씨는 이미 야근에 익숙해졌다고 말했다. 그는 "회사 인원 10명을 못 넘는 우리 같은 곳은 야근이 일상적이라고 봐야 한다"라며 "일감을 항상 수주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보니 (의뢰가) 들어오는 족족 받는데, 기한에 맞춰서 완성하려면 초과근무를 할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현재 근로기준법의 법정 근로시간은 1일 최대 8시간, 1주 최대 40시간이다. 여기에 더해 초과 연장 근무시간은 1주 최대 12시간으로, 모두 합쳐 1주일에 최대 52시간을 근무할 수 있다. 다만 영세 사업장에는 예외가 붙는데, 5인 미만 사업체는 주 52시간 의무의 제한을 받지 않으며, 5인 이상~30인 미만 중소 사업장의 경우에도 1주 8시간 한도를 추가로 부여해 총 '1주 60시간' 근무가 가능하다.


가산디지털산업단지는 약 1만1000개 이상의 기업체가 입주한 국내 대표적 IT 산업 단지 중 하나다. / 사진=임주형 기자 skepped@

가산디지털산업단지는 약 1만1000개 이상의 기업체가 입주한 국내 대표적 IT 산업 단지 중 하나다. / 사진=임주형 기자 skepp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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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씨는 "정말로 바쁠 때는 1주일에 60시간 근무도 해본 것 같다"라며 "하루에 10시간 이상 일하는 건 기본이고, 가끔 주말을 자진 반납하고 작업하는 일도 있었다. 집에 들어가면 씻지도 못하고 잠만 자는 경우도 많았고, 그런데도 항상 잠이 부족했다"라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사람이 1주일 60시간씩 일해도 몸이 얼마 못 버티는데 120시간은 말도 안 된다"라며 "아마 그런 말을 한 사람은 한 번도 야근해 본 적이 없었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주 120시간 노동' 논란은 윤 당선인이 국민의힘 대권 주자였던 지난해 7월, 한 매체와 인터뷰를 진행한 뒤 불거졌다. 당시 윤 당선인은 문재인 정부의 '주 52시간 근무제'를 비판하면서 "현 정부는 주 52시간제로 일자리가 생긴다고 주장했지만 일자리 증가율이 0.1% 불과하다는 통계도 있다. 실패한 정책"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면서 "스타트업 청년들을 만났더니, 주 52시간제도 시행에 예외 조항을 둬서 근로자가 조건을 합의하거나 선택할 수 있게 해달라고 토로하더라. 게임 하나 개발하려면 한 주에 52시간이 아니라 일주일에 120시간이라도 바짝 일하고, 이후에 마음껏 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윤 당선인이 직접 '주 120시간 노동을 허용하자'며 제안한 것은 아니지만, 일부 근로자들은 차기 정부부터 근로시간 한도 제한이 철폐될 가능성이 있는 게 아니냐며 우려를 표했다.


지난 2000년대 초반 모바일 게임 개발 기업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다는 40대 B씨는 "물론 120시간 근무를 정말로 허용하지는 않겠지만, 갑자기 정부가 근로시간 규제를 풀면 '크런치(게임 개발 중 막바지에 초과 근무를 통해 완성도를 끌어 올리는 작업)' 관행이 다시 돌아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불안감을 드러냈다.


그는 "불과 10년 전만 해도 게임 산업은 대기업, 중소기업 할 것 없이 크런치를 해왔다. 건강이 악화해서 요양을 하거나 퇴사하는 개발자들도 상당히 많았던 때"라며 "그나마 근로기준법이 점점 정비되면서 대기업부터 중견기업 순으로 차차 없어지고 있는 걸로 아는데, 이런 기업 근로 문화 개선이 역행해 버리는 건 아닌가 (걱정된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게임업계의 과로 관행인 크런치는 주52시간제가 중소 사업장(50인 이상~300인 미만)에 본격적으로 도입된 지난 2020년 이후 개선되는 모습을 보인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지난해 말 발표한 '2021 게임산업 종사자 노동환경 실태조사'에 따르면, 게임 개발자 중 '크런치가 있다'라고 답변한 비중은 지난 2019년 60.6%에서 2020년 23.7%로, 지난해에는 15.4%로 점차 감소했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노동 공약은 선택적 근로시간제 정산기간 연장, 특별연장근로 포함 대상 추가 등 노동시간 유연화에 초점이 맞춰졌다. / 사진=아시아경제DB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노동 공약은 선택적 근로시간제 정산기간 연장, 특별연장근로 포함 대상 추가 등 노동시간 유연화에 초점이 맞춰졌다. / 사진=아시아경제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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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윤 당선인의 노동 공약에는 구체적으로 현행 법정 근로시간을 늘리겠다는 언급은 없다. 다만 차기 정부는 정해진 근로시간을 유연화하거나, 스타트업 등 특수한 상황에 놓인 사용자에 한해 추가 근무시간을 허용하는 방안 등을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윤 당선인의 대선 공약을 보면, 1주 노동시간을 특정 기간 동안 평균 40시간 이내(연장 노동 포함 시 52시간)로 맞추면 법을 지킨 것으로 보는 '선택적 근로시간제'의 정산기간을 현행 1~3개월에서 1년으로 대폭 늘리자는 제안이 있다. 선택적 근로시간제 정산기간은 당초 1개월이었으나 지난 2020년 개정된 근로기준법이 통과하면서 3개월까지 확대됐다.


또 특정 사유에 한해 주 52시간 근무를 초과할 수 있는 '특별연장근로' 대상에 신규 스타트업을 포함시키자는 방안도 있다.


즉, 총 근로시간이 극적으로 확대되는 것은 아니더라도, 노동력이 부족한 특정 시기에 업무 시간을 대폭 증가시키는 '탄력적 근로'는 보편화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전문가는 현행 법정 근로시간 제한을 완화하기만 하면 장시간 불법노동 관행이 더욱 심화될 수 있다며, 이를 방지할 방안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박성우 직장갑질119 노무사는 "한국에 불법 연장근로, 공짜노동 강요가 여전히 판을 치는 현실에서 주 52시간 상한이 과도한 규제라고 하는 것은 현실을 모르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박 노무사는 국내 불법 연장근로 관행이 줄어들지 않는 이유는 연장·야간·휴일 근무 등 초과 노동 시간과 상관없이 미리 정해진 기본급과 수당을 일괄 지급하는 '포괄임금제'에 있다고 설명했다. 실질적인 연장 근로 시간에 상관없이 똑같은 임금을 지급할 수 있는 제도 때문에 사용인이 피고용자의 노동 시간을 단축시킬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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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차기 정부 노동 정책은 지난 몇 년간 진행된 노동시간 단축의 사회적 분위기를 훼손하고 역행시킬 우려가 있다"라며 "노동시간 정책은 주 52시간 상한제 폐지나 완화가 아닌, 우선 장시간 불법노동을 가능케 한 포괄임금제 폐지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임주형 기자 skepped@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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