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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한 모금]영화를 본다…이야기가 아니라 '시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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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그 자체로 책 전체 내용을 함축하는 문장이 있는가 하면, 단숨에 독자의 마음에 가닿아 책과의 접점을 만드는 문장이 있습니다. 책에서 그런 유의미한 문장을 발췌해 소개합니다.

영화를 전공한 소설가 서이제와 영화를 좋아하는 번역가 이지수가 함께 쓴 산문집이다. 두 사람은 이지수 번역가의 북토크를 서이제 소설가가 맡으면서 첫 만남을 가졌다. 그날의 풍경과 대화가 각자의 머릿속에 생생하게 자리 잡으면서 함께 “영화에 관한, 영화관에 관한, 영화와 얽힌 사람들에 관한” 기억을 눌러 담은 책을 함께 쓰게 됐다. 하나의 주제 아래 한 편씩 글을 주고받은 두 사람은 영화를 보던 당시의 추억과 영화가 건네는 메시지를 서로의 시선을 통해 체험한다. 막연히 극장에 간다는 설렘에 하굣길을 내달리던 청소년기, 좋아하는 걸 넘어 직접 영화를 찍게 된 대학 시절, 상사를 따라 울며 겨자 먹기로 영화를 보러 간 직장 생활까지 영화는 과거의 곳곳에서 목격된다. 두 사람은 영화와 관련한 삶의 한때와 기억을 공유하며 풍성한 서사를 선사한다. 저자는 말한다. "나는 최근에서야 알게 되었다. 내가 영화를 통해 보고 싶었던 것은 이야기가 아니라 시선이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니까 타인이 보는 세상을 나도 보고 싶었다."

[책 한 모금]영화를 본다…이야기가 아니라 '시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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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끔 영화가 사라진 세상을 상상했다. 그러니까 거대한 인류의 역사에 고작 100년에서 200년 정도 잠시 존재했던 예술이 될지도 모른다고. 영화는 정말 이대로 끝인가? 이따금 나는 생각하고,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영화가 지속될 것이라고 믿는다. 사라짐을 상상한다는 것은 언제나 사랑의 증거가 되었으니까. - p.20


우리는 빈틈이 메워지는 짜릿한 순간만을 위해 살지 않는다. 삶은 오히려 그 앞과 뒤에 더욱 길게 펼쳐져 있다. 틈을 메워 강렬한 행복이나 만족감을 느끼는 건 우리의 길고 지루한 인생에서 이따금 꼭 필요한 순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존재하는 모든 틈을 미친놈처럼 일일이 메울 수 없다면, 어떤 틈과는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익히는 편이 좋을지도 모른다. - p.56~57

“혼자가 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내가 없는 것이다”라고 시작하는 소설을 쓴 적이 있다. 극장에서의 경험은 내가 잠시 사라지는 경험이기도 했고, 동시에 수많은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나는 줄곧 혼자였지만, 그런 방식으로 이따금 혼자가 아닐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혼자라는 사실을 잠시 잊거나 지우거나, 또는 각자 혼자 함께하거나. - p.67~68


사라졌지만 이어지는 것이 있다는 믿음. 나는 어쩌면 나 자신에게는 도통 생기지 않았던 그 낭만적인 믿음을 영화를 통해서나마 간접 체험 하는 게 좋아서 〈바닷마을 다이어리〉를 편애하는지도 모른다. 모든 이야기는 어떤 형태로든 이어진다고, 나도 언젠가 그렇게 믿을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 p.107


상영관의 암전은 다른 세계로의 진입을 알리는 큐 사인이다. 다시 불이 켜지며 현실 세계로 돌아왔을 때, 거기에는 분명 이전과는 미세하게 다른 마음을 갖게 된 내가 있다. - p.158

영화는 내게 또 다른 언어를 가르쳐주었다. 이미지를 통해 말하는 법을, 시선을 통해 말하는 법을, 침묵을 통해 말하는 법을 말이다. - p.208


사랑이라는 단어가 빠짐으로 인해 모호하게 풍성해지는 관계. 거기서 서래는 늘 해준보다 몇 걸음 앞서 나아가 나중에 오는 해준을 기다린다. 서래의 중국어를 해준이 통역 앱을 통해 한 박자 늦게 알아듣는 장면은 마치 이들의 이러한 관계를 은유하는 것 같다. 그런 둘의 궤적을 오선지에 옮기면 먼저 출발한 선율에 나중에 출발한 선율이 쌓여 화음을 이루는 돌림노래가 될지도 모른다. - p.219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미지를 사랑할 때, 그것을 믿을 때, 이미지는 우리 곁에 한 발 더 가까이 다가와주었다. 마치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아사코와 바쿠가 창을 넘어온 것처럼. 그들은 마치 스크린 밖으로 나온 사람들처럼 거기에 있었다. 영화는 세상을 보는 창이었지만, 우리에게는 그 창을 열 수 있는 힘이 있었다. 창을 열어두면, 언제나 사랑하는 이미지가 우리에게로 왔다.- p.236


사랑하는 장면이 내게로 왔다 | 서이제·이지수 지음 | 마음산책 | 252쪽 | 1만5000원





서믿음 기자 fait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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