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쓰메 소세키 쓰고 이치카와 곤 그린 '마음'
자기본위에 상처받고 세상과 단절한 인물 조명
역사·사상적 맥락서 낡아…메이지 정신도 강요
영자원 '재팬 파운데이션 무비페스티벌'서 상영
일본 근현대문학의 꽃은 소설이다. 사실성과 전형(典型) 창조로 당대 현실을 재현했다. 후자는 공동체의 평균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해당 집단의 특징만 강하게 내포했다. 급변하는 사회에서 가시밭을 헤치며 세태의 실상을 낱낱이 알렸다. 미묘한 심리를 드러내 구조적 모순도 가리켰다. 작가의 사상과 의식으로 만들어진 거울과 같았다.
처음 표본을 제시한 문호로는 나쓰메 소세키(1867~1916)가 꼽힌다. 지금도 일본 중산층 인생을 면밀하게 검증했다고 평가받는다. 소설 속 주인공 대부분은 대학에서 교육받은 남성이다. 자기본위에 상처받고 세상과 단절한다. 자기본위는 자신의 감정이나 이해관계를 기준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일. 지나치면 잘못된 편견에 사로잡히기 쉽다. '마음(1914)'의 선생이 대표적인 예다. 한 여자를 동시에 사랑한 친구를 자살로 몰아간 죄책감에 시달려 자신도 죽음을 택한다.
"죽었다 생각하고 살자고 결심한 내 마음은 때때로 외부 자극으로 인해 흔들렸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내가 작은 끄나풀이라도 잡으려고 손을 뻗으면 곧 예전의 그 무서운 힘이 찾아와 나를 꽉 움켜쥐고 꼼짝할 수 없게 만들었네. 그리고 그 힘이 내게 넌 어떤 일도 할 자격이 없는 놈이라고 소리쳤네. 그러면 세상에 내밀어볼까 했던 내 손은 금세 오그라들고 말았네. 이런 일은 몇 번이나 반복됐지. 일어나려 하면 누르고, 눈을 뜰까 하면 다시 검은 그림자가 닥쳤네. 나는 두 손을 불끈 쥐고 그림자를 향해 소리쳤네. 왜 내 앞길을 가로막느냐고. 무서운 힘은 얼음같이 찬 웃음소리를 내며 네 스스로 잘 알지 않냐고 내게 말했지. 나는 다시 주저앉았네."
본능적 욕망과 사회·개인적 윤리 사이에서 고뇌하는 내면은 이치카와 곤(1915~2008) 감독이 연출한 영화 '마음(1955)'에서도 나타난다. 선생인 노부치(모리 마사유키)와 친구 가지(미하시 다츠야)의 복잡 미묘한 관계가 전면에 배치됐다. 전자는 에고이즘(자신의 이익만을 꾀하려는 태도)과 윤리 의식 사이에서 끊임없이 번민한다. 어둠의 근원은 대학생 히오키(야스이 쇼지)를 통해 드러난다. 노부치와 함께 지내다 아버지의 병환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내려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편지를 받는다. 자살을 결심한 노부치의 유서다.
이치카와 감독은 고통, 걱정, 절망, 혼란 등 죽음에 이르기까지 감정을 전달하는 데 주력한다. 모리 마사유키가 억누르며 연기해 뚜렷하진 않지만 카메라 움직임 등에서 분명한 목적성이 나타난다. 감각적 연출은 오는 25일부터 다음 달 11일까지 하는 '재팬 파운데이션 무비 페스티벌'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일본국제교류기금 서울문화센터와 한국영상자료원이 매년 주최하는 행사다.
올해는 일본 근현대문학 작가 여덟 명(나쓰메·가와바타 야스나리·다니자키 준이치로·다자이 오사무·미시마 유키오·우노 치요·하라다 야스코·하야시 후미코)의 원작으로 연출된 영화 열여섯 편을 상영한다. 이치카와 감독의 '마음'·'열쇠(1959)'·'타오름(1958)'·'오항(1984)'을 비롯해 모리타 요시미츠 감독의 '소레카라(그 후·1985)', 도요다 시로 감독의 '설국(1957)'·'고양이와 쇼조와 두 여자(1956)', 니시카와 가츠미 감독의 '이즈의 무희(1963)', 마스무라 야스조 감독의 '만지(1964)', 네기시 기치타로 감독의 '비용의 처(2009)', 나카히라 고우 감독의 '흔들리는 미덕(1957)', 구라하라 고레요시 감독의 '사랑의 갈증(1967)', 고쇼 헤이노스케 감독의 '만가(1957)',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만국(1954)'·'부운(1955)'·'방랑기(1962)' 등이다. 하나같이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등에서 보기 어려운 작품들로, '소레카라(그 후)'를 제외하고 35㎜ 프린트로 상영된다. 한국영상자료원 관계자는 "근대를 살아간 작가들의 불안과 음울, 권태, 열정과 미에 대한 집착, 유머와 희망을 스크린에서 확인할 수 있다"라고 소개했다.
소설에 비할 바는 아니다. 인물의 내면을 들여다볼 기회가 적다. 관찰 수준도 상대적으로 깊지 않아 긴 여운만 받기 쉽다. '마음'도 예외는 아니다. 히오키의 시선과 노부치의 내레이션 초점이 추리와 본질에 관한 설명에 각각 맞춰졌다. 그 사이에 '왜?'라는 질문은 끼어들 틈이 없다. 그래서 자기희생의 윤리적 체현 배경인 충군애국 이념이나 명예 회복 등이 흐릿하게 나타난다. 소설에서는 정신주의의 근간으로 무사도 윤리가 직접적으로 나타난다. 서양 문명에 대항할 일본 고유의 정신 윤리로까지 대두한다. 구습에 가까워 역사·사상적 맥락에서 낡은 느낌을 준다.
윤상인 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교수는 2015년 열린연단 강연에서 "'마음'이라는 텍스트는 죄의식으로 괴로워하는 '개인의 마음'과 메이지 시대를 살아온 '신민의 마음'이라는 두 가지 차원에서의 '마음' 이야기가 중첩돼 중층 구조를 이룬다"라고 설명했다. "지금까지 메이지의 종언과 함께 선생이 자살하는 것은 아무래도 부자연스럽다는 견해가 주류를 이루어 왔는데, 그것은 이러한 중층이 초래한 결과일 것이다. 이 중층은 이 텍스트가 지닌 정치적 모호함의 근원을 이루기도 한다. (…) 세 사람(천황·노기 대장·선생)의 죽음은 각각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죽음이라는 물리적 현상에 역사와 국가에 대한 관념이 개입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메이지 천황의 죽음은 적어도 이 소설 속의 등장 인물들에게는 신민 의식뿐만 아니라 국가와 시대에 대한 일체감을 균질하게 조성한다. 아울러 천황의 죽음은 '메이지의 정신'이라는 국가적 이념으로 표상된다."
영화에서는 잊히지 않는 편린 속에서 털어놓는 후회와 뉘우침 정도로 전달된다. 당시 사회상보다 인간적인 고백이란 틀이 부각돼 소설과 다른 인상까지 받을 수 있다. 그렇다고 복고적 색채나 충군애국 이념이 철저히 배제된 건 아니다. 예컨대 노부치가 죽음을 결심하기 직전 신에는 천황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세밀하게 묘사됐다. '가르치는' 텍스트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방증이다. 소설은 여러 교육 현장에서 견실한 국민을 양성하기 위한 수신서로 꾸준히 읽혀왔다. 금욕적 정신주의를 강조하는 국민적 도덕으로 추앙을 받았다. 극단적인 자기희생은 결코 고귀한 인간을 표상할 수 없다. 수신(修身)을 명분으로 내건 교사에 불과하다. 전달하는 매체가 달라져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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