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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르포]도박이 된 필리핀의 카르텔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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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 최민식와 손석구 주연의 드라마 ‘카지노’가 화제다. 한국에서 풍문으로만 떠돌았던 동남아 원정 도박의 세계를 한 남자의 굴곡진 인생사를 통해 본격적으로 그려내기 때문이다. 해외를 자주 드나든 기업인이라면 ‘정킷방’이라고 불리는 프라이빗하고 고급스러운 카지노 관련 얘기와 완전히 담쌓고 살 수 없다. 다만 게임장에 발을 들이게 되면 씀씀이 통제가 어렵고, 동시에 환치기와 탈세 등 불법행위로 이어질 가능성이 커 피하는 게 상책이다. 아시아에서는 마카오와 필리핀이 도박을 즐기기 쉬운 대표적 나라다. 특히 필리핀엔 범법행위를 부추기는 교민도 적지 않을 뿐만 아니라 범죄를 수수방관하는 부패한 공무원 탓에 관련 사건 사고도 다수 있었다. 그런데 왜 하필 필리핀에 이 같은 부정적 이미지가 덧씌워져 있는 것일까.

디즈니+ 드라마 '카지노'의 한 장면. 사진제공=디즈니

디즈니+ 드라마 '카지노'의 한 장면. 사진제공=디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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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7월 봉봉 마르코스 주니어(56)가 대통령에 취임하며 각종 설화와 사건·사고로 점철된 두테르테 대통령과 임무를 교대했다. 신임 봉봉 마르코스는 한국의 중년층에게 널리 알려진 고(故) 페르난디드 마르코스 대통령(재임 기간 1965~1986)의 장남인 탓에 ‘독재자 아들’의 귀환으로 화제를 모았다. 전임 두테르테는 ‘마약과의 전쟁’을 전면에 앞세워 나라의 기강을 잡으려고 시도했지만 그다지 성공적이라고 보기 어려운 성과를 남겼다.


두테르테가 그냥 조용히 사라지지 않았다. 장녀인 사라 두테르테(45)를 당당히 부통령으로 남겼다. 따지고 보면 봉봉 마르코스를 지난 대선에서 부통령 후보로 발탁한 것도 두테르테이니 일종의 두 가문이 대통령직을 두고 사실상 정치적 거래를 한 거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래서 필리핀에서 지난 대선을 북쪽(루손섬) 남쪽(다바오시)의 마르코스-두테르테 동맹이라 부르고, 전·현직 부자와 부녀 대통령이 함께 낀 이 동맹을 ‘왕조 카르텔’로 묘사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두테르테의 정치적 고향인 다바오시에는 또 다른 아들인 세바스티안이 차기 시장을, 막내아들이 지역 의원으로 활약하고 있다. 봉봉 마르코스의 아들 산드로 역시도 하원 의원을, 가까운 친인척 가운데도 정계에서 활약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필리핀에는 과거 대통령이나 상·하원 의원을 거친 빌라르(Villar), 아로요(Arroyo), 에스트라다(Estrada), 카예타노(Cayetano)와 같은 지역 맹주들 역시 이 두 왕조와 비견될 정도로, 이들의 친족들이 정치와 재계의 전면에 나서 사실상 필리핀을 분할 지배하는 모양새다.


필리핀의 사법부와 경찰, 그리고 정치권이 부패했다는 비난을 받는 데는 ‘정치적 왕조’들이 고려시대 호족(豪族) 세력에 비견되는 봉건적 질서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필리핀 각 지방의 거대한 땅을 상속세 없이 대대로 물려받기 때문에 이들 세력은 자연스럽게 정치적 지위까지도 함께 물려받는다. 돈과 권력을 대대로 물려받을 수 있다면 경찰이나 사법부가 두려울 이유가 없다. 자연스레 정치 권력과 경제 권력까지 양손에 쥐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국가 운영을 주도하는 식이다.


1970년대까지 아시아의 선진국이던 필리핀이 진작에 중진국 함정에 빠져, 이제는 관광 산업과 해외 인력 수출 이외에 뚜렷한 국가 비전을 찾지 못한 배경이 된다. 앞서 언급한 도박산업이 횡행하고 뇌물만 밝히는 부패 공직자가 많은 이유도 전국에 산재한 왕조 카르텔의 존재와 무관치 않다. 역사학자들은 16~20세기 사이 스페인·미국·일본의 식민지를 거친 필리핀이 정권에 충성만 하는 소수의 엘리트를 낳았고, 이들 권력은 섬나라 특성상 자신의 고향에 똬리를 틀고 단 한 번도 교체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이런 소수의 특권층은 갈수록 부자가 됐지만, 일반 서민들은 저임금과 고물가, 나쁜 교육 환경으로 인해 빈곤의 늪에 허덕이는 것이다.

1986년 민주화 혁명으로 하와이로 쫓겨난 마르코스 집안이 37년 만에 정치의 중심으로 소환된 배경엔 좋았던 1970년대에 대한 향수 탓이 절대적이지만, 외부 환경은 크게 바뀌었다. 봉봉 마르코스 대통령이 마주한 숙제는 크게 두 가지다. 3년 넘게 이어진 코로나로 인해 쑥대밭이 된 필리핀 경제를 살려야 하는 것이 첫째다. 이보다 더 민감한 문제는 이미 중국의 앞마당이 된 남중국해를 비롯한 필리핀 주변 해역에서 과거의 동맹인 미국의 요구를 적절하게 조율하며 필리핀의 주권을 지켜내야 하는 대목이다. 그리고 이 두 문제는 절대적으로 연결돼 있다.


마르코스는 취임 전부터 뚜렷한 ‘친미파’로 분류된 인물이다. 이미 오래전 미국의 관용이 없었다면 하와이 망명 시절부터 국부 유출로 인한 천문학적인 소송에 시달렸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필리핀 독재자의 자제답게 영국 옥스퍼드와 미국 와튼스쿨에서 교육받은 인물이기도 하다. 미국의 이해를 대변하는 필리핀 정치 세력의 대표주자인 셈이다. 실제로 마르코스는 초강대국이 된 중국에 대한 비판을 꺼렸던 전임자 두테르테와 달리 "중국이 이 지역에서 필리핀의 해상권을 짓밟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거 기간 내내 주장했다.


나아가 아버지 마르코스는 아시아에서 가장 유명한 친미파 정치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세기 내내 미국은 필리핀을 가장 각별하게 챙기며 아시아 현대화를 주도했고, 1960~70년대 베트남전 당시는 반공산주의 진영의 중심으로 삼았다. ‘피플파워’로 마르코스가 쫓겨났을 때도 받아준 곳이 미국 하와이니, 친중 및 반서방 행보를 지속한 두테르테에 놀란 미국이 마르코스의 당선을 가장 반겼을 것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그런데 날로 추락하는 필리핀의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중국의 투자와 관광객 유치에 신경을 써야 하는 것도 냉엄한 현실이다. 동아시아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중국과 가장 많은 해상 경계를 공유하는 게 필리핀이고, 자연스럽게 수많은 중국인이 여행과 투자를 위해 필리핀을 방문한다. 더 이상 서방 자본이 찾지 않는 필리핀에 중국이 빠진다면 경제추락은 불 보듯 뻔한 상황. 이를 잘 알고 있는 마르코스는 취임 직후 먼저 미국을 방문하고, 올해 벽두엔 중국을 방문해 시진핑 국가주석과 악수했다. 필리핀이 처한 정치·경제적인 문제를 풀어내려는 시도다. 과연 필리핀의 새 대통령은 미국과 중국이라는 두 초강대국의 요구를 현실적으로 절충해 낼 수 있을 것인가. 필리핀 정치 카르텔도 일종의 복잡하고 민감한 실험, 혹은 도박을 하고 있는 셈인지 모른다.


정호재 고려대 아세안센터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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