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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천자]노천명, 설야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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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아시아경제는 ‘하루만보 하루천자’ 뉴스레터 독자를 위해 매일 천자 필사 콘텐츠를 제공한다. 필사 콘텐츠는 일별, 월별로 테마에 맞춰 동서양 고전, 한국문학, 명칼럼, 명연설 등에서 엄선해 전달된다. 오늘의 콘텐츠는 노천명의 <설야산책>이다. 글자수는 1168자로 길지만 금요일과 주말에 시간을 내어 시인이 돼 보자.
<사진=아시아경제 DB>

<사진=아시아경제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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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을 먹고 나니 퍼뜩퍼뜩 눈발이 날린다. 나는 갑자기 나가고 싶은 유혹에 끌린다. 목도리를 머리까지 푹 눌러 쓰고 기어이 나서고야 만다.

나는 이 밤에 뉘 집을 찾고 싶지는 않다. 어느 친구를 만나고 싶지도 않다. 그저 이 눈을 맞으며 한없이 걷는 것이 오직 내게 필요한 휴식일 것 같다. 끝없이 이렇게 눈을 맞으며 걸어가고 싶다.

눈이 내리는 밤은 내가 성찬을 받는 밤이다. 눈은 이제 대지를 희게 덮었고, 내 신바닥이 땅 위에 잠깐 미끄럽다. 숱한 사람들이 나를 지나치고 내가 또한 그들을 지나치건만, 내 어인 일로 저 시베리아의 눈 오는 벌판을 혼자 걸어가고 있는 것만 같으냐?

가로등이 휘날리는 눈을 찬란하게 반사시킬 때마다 나는 목도리를 더욱 눌러 쓴다.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느끼면서도 발길은 좀채 집을 향하지 않는다.

기차 바퀴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지금쯤 어디로 향하는 차일까. 우울한 찻간이 머리에 떠오른다. 그 속에 앉았을 형형색색의 인생들, 기쁨을 안고 가는 자와 슬픔을 받고 가는 자를 한자리에 태워 가지고 이 밤을 뚫고 달리는 열차, 바로 지난해 정월 어떤 날 저녁의 의외의 전보를 받고 떠났던 일이, 기어이 슬픈 일을 내 가슴에 새기게 한 일이 생각나며, 밤 차 소리가 소름이 끼치도록 무서워진다.

이따금 눈송이가 빰을 때린다. 이렇게 조용히 걸어가고 있는 내 마음속에 사라지지 못할 슬픔과 무서운 고독이 몸부림쳐 견디어 내지 못할 지경인 것을 아무도 모를 것이다.

이리하여 사람은 영원히 외로운 존재일지도 모른다. 뉘집인가 불이 환히 켜진 창 안에서 다듬이 소리가 새어 나온다.

어떤 여인의 아름다운 정이 여기도 흐르고 있음을 본다. 고운 정을 베풀려고 옷을 다듬는 여인이 있고, 이 밤에 딱다기를 치며 순경(巡警)을 돌아 주는 이가 있는 한 나도 아름다운 마음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머리에 눈을 허옇게 쓴 채 고단한 나그네처럼 나는 조용히 집 문을 두드린다.눈이 내리는 성스러운 밤을 위해 모든 것은 깨끗하고 조용하다. 꽃 한 송이 없는 방안에 내가 그림자같이 들어옴이 상장(喪章)처럼 슬프구나.

창 밖에선 여전히 눈이 싸르르싸르르 내리고 있다. 저적막한 거리 거리에 내가 버리고 온 발자국들이 흰 눈으로 덮여 없어질 것을 생각하며 나는 가만히 눕는다. 회색과분홍빛으로 된 천정을 격해 놓고 이 밤에 쥐는 나무를 깎 고 나는 가슴을 깎는다.




이명환 기자 lifehw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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