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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천자]이정림, 겨울 산에서 시작하리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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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아시아경제는 ‘하루만보하루천자’ 뉴스레터 독자를 위해 매일 천자 필사 콘텐츠를 제공한다. 필사 콘텐츠는 일별, 월별로 테마에 맞춰 동서양 고전, 한국문학, 명칼럼, 명연설 등에서 엄선해 전달된다. 오늘의 콘텐츠는 이정림의 <겨울 산에서 시작하리라>(1986) 1회차다. 글자수 1000자.

<사진=아시아경제 DB>

<사진=아시아경제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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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산을 오른다. 봄은 봄대로, 여름은 여름대로, 또 가을은 가을대로, 산은 저마다 다른 개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 어느 절기의 산보다 겨울의 산은 독특한 매력으로 나를 이끈다.


겨울 산에 서면, 늘 나는 내 육체가 서서히 비어 감을 느낀다. 잎사귀를 떨어내고 가지로만 서 있는 나목(裸木)처럼, 내 몸의 살과 피가 그대로 몸 밖으로 빠져 나가는 듯한 착각이 인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당당하게 드러내고 있는 겨울나무는 그 추위 속에서도 굳건히 버티고 섰다. 그것은 그 몸에 끊이지 않고 도는 수액(樹液)이 있기 때문이다.


겨울 산에서 나는 한 그루 나목이 된다. 그리고 나무의 수액과도 같은 나의 정신과 만난다. 좀 더 일찍 그것과 마주하지 못한 것은, 나무의 무성한 잎들처럼 내 정신을 덮어 가리는 그 현란한 위선과 가식으로 해서였다. 그것은 지나치게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을 보면 그의 참모습이 제대로 분간되지 않는 것과도 같고, 교양이란 이름으로 지나치게 자신을 가리고 있는 사람을 보면 그의 본질이 확연히 파악되지 않는 이치와도 같다.


겨울 산은 이 모든 가식(假飾)을 벗겨 낸다. 그리고 알몸과 같은 순수로 정신과 만나게 한다. 정신이 번쩍 들 만큼 차가운 공기 속에서, 나는 그것을 생생히 느낄 수 있다. 겨울산은 나와 정신을 만나게 해 주고, 또 그것을 정화(淨化)시켜 주는 종교와도 같다. 내게 산은 바로 거대한 교회인 것이다.

겨울 산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면, 저절로 눈에 눈물이 돈다. 조금도 슬픈 것은 아닌데, 그냥 눈물이 고인다. 차가운 공기가 눈을 씻어 주기 때문이다. 눈뿐만 아니라 폐부도 씻어내 준다. 그것은 가슴이 아린 명징(明澄)이다.


마음을 가리고 있던 혼탁한 꺼풀이 벗겨지니, 눈이 맑아진 만큼 마음도 맑다. 맑은 눈을 가지고 있어야 맑은 마음을 지닐 수 있고, 맑은 마음을 지니고 있어야 사물을 바라보는 눈도 맑을 수 있다. 눈과 마음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겨울 산은 눈을 맑게 해 주는 정수(淨水)와도 같다. 내게 산은 바로 거대한 샘물인 것이다.




이명환 기자 lifehw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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