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도국 지위 결정 늦출수록 협상력 잃어"…포기가 국익 더 크다 판단
홍남기 "지위 주장해도 혜택 인정해줄 가능성 없다"
농업계 "포기말라" 반발…전체예산의 4~5% 농업예산 증액 요구
[아시아경제 김민영 기자] 정부가 세계무역기구(WTO) 내 개발도상국 지위를 사실상 포기하기로 한 것은 미국이 WTO의 개혁을 끊임없이 주장하는 가운데 향후 미국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국익에 더욱 도움이 된다고 판단한 데 따른 것이다. 하지만 이번 결정이 농업에 미칠 파장도 작지 않아 농업계와 정부 간 갈등이 격화될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미래 WTO 농업 협상이 타결되기 전까지 우리 농업에 아무 영향도 없다는 입장이지만 농민단체는 농업 예산 증액 등을 요구하며 강경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개도국 지위 고집, 득보다 실 많아= 앞서 미국은 경제적 위상 발전 수준이 높은 국가들이 개도국 특혜를 누리고 있다며 개선을 지속적으로 요구해왔다. 지난 7월에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국을 포함한 11개국을 지목하며 90일(10월23일) 내 상황 진전이 없으면 개도국 대우 중단,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반대 등의 독자 조치를 하겠다며 압박했다.
정부는 기존 WTO 협상을 통해 얻은 혜택은 그대로 유지하는 데다 미국의 자동차 무역확장법 232조 조치 결정 시한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개도국 지위를 고집할 경우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다고 판단하고 있다. 이날 정부는 국익을 우선한다는 대원칙하에 경제적 위상, 싱가포르ㆍ브라질 등 주변국들의 개도국 지위 포기 선언 등을 고려해 "미래 협상 시 개도국 특혜를 주장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개도국 지위 포기가 아닌, 미래 협상 시 특혜를 주장하지 않겠다는 점을 명확히 한다"고 강조했지만 사실상 개도국 지위 포기를 공식화한 셈이다. 홍 부총리는 "현시점에서 개도국 지위 특혜를 주장하더라도 향후 협상에서 개도국 혜택을 인정해줄 가능성이 거의 없고, 결정이 늦어질수록 대외적 명분과 협상력을 잃어버릴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컸다"고 강조했다.
우리나라는 과거 개도국 대우를 적용한 이행계획서를 WTO에 회람하고 검증을 받아 지금까지 개도국 지위를 누려왔다. 1995년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에 따라 개도국은 관세 감축과 국내 보조에서 선진국 의무의 3분의 2만 이행하게 돼 있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는 1989~1991년 보조금 총액의 13.3%를 10년간 감축해 연간 총 1조4900억원 규모의 농업 보조금이 허용돼 있다.
정부는 이번 결정으로 농업계에 당장 영향이 미치지는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정부는 "미래 협상이 타결돼야 개도국 특혜가 적용되지 않으므로 그 전까지는 국내 농업 분야에 미치는 영향이 없다"고 말했다. 농업 협상의 경우 2008년 결렬된 이후 10년 넘게 중단된 상태이고 향후 재개 여부도 불확실하기 때문에 개도국 지위를 포기해도 농업계가 우려하는 보조금 감축, 관세 인하 등이 당장 현실화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농업 피해 당장 없지만 미래 불확실= 그러나 개도국 특혜를 주장하지 않기로 하면서 향후 재개될 WTO 농업 협상에서는 관세와 보조금을 현재 수준으로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WTO 차기 농업 협상의 개시 여부와 시기는 현재로서는 예측하기 어렵지만, 개도국 특혜를 주장하지 않는다는 결정은 차기 농업 협상에서 한국에 부담으로 작용할 것으로 관측된다. 농업계는 당장 피해는 없더라도 차기 무역 협상이 진전돼 타결되면 관세와 보조금의 대폭 감축과 이에 따른 큰 피해가 예상된다고 우려하고 있다.
정부는 개도국 지위 포기에 대한 대응 방안으로 미래 WTO 등 농업 협상에서 쌀 등 민간 분야를 최대한 보호하고, 미래 협상 결과 국내 농업에 영향이 있으면 반드시 피해 보전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공익형 직불제 도입ㆍ청년 후계농 적극 육성 등을 위한 내년도 농업 예산 16조원 편성 등 농업 경쟁력 제고를 위한 정책 추진도 약속했다.
정부의 이 같은 대책에도 농민단체들의 반발 수위는 낮아지지 않고 있다. 미래 협상 전까지 보조금ㆍ관세율 등에 대한 영향이 없는 것이지 미래 협상 결과에 따라 보조금 감축, 관세율 인하가 현실화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김홍길 축산관련단체협의회장은 "직불제 개편과 농업 예산 증액을 대책이라고 발표했는데 이는 개도국 지위 포기에 대한 대책이 아니라 농림축산식품부가 올해 초부터 추진하던 정책"이라며 "보조금 감축, 관세율 인하 등에 대해 안심할 수 없는 상황에서 농업계 보호 대책 등이 마련되지 않으면 시위 등 강경 대응도 불사하겠다"고 말했다.
농업계는 농업 예산을 전체 예산의 4~5% 수준으로 증액해달라고 요구하고 있지만 정부가 이에 대한 확답을 내놓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이미 내년도 예산안을 제출한 상태여서 농업계의 요구를 반영하려면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서 예산을 증액할 수밖에 없어 정부가 아닌 국회에 결정권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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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부총리는 "농업 경쟁력 향상에 중점을 두고 관련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재원 확보에 만전을 기하겠다"며 "아울러 앞으로도 농업계 전문가들의 의견을 수용하면서 농업 경쟁력 대책을 추가로 보완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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