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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길의 가을귀]허균은 왜 홍길동을 율도국 왕으로 만들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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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 최후의 19일...마지막 순간을 재조명하다

[이종길의 가을귀]허균은 왜 홍길동을 율도국 왕으로 만들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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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전'은 문제의식이 강한 소설이다. 진보적인 역사의식으로 다양한 사회문제를 다루며 지배의 이념과 질서를 비판한다. 그 줄기와 뿌리는 16세기부터 빈번해진 농민봉기와 이를 주도한 자들에 대한 구비전승이다. 홍길동은 팔도 수령들이 부정하게 모은 재물을 탈취해 빈민에게 나눠준다. 국왕은 홍길동을 잡으려고 하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결국 설득과 회유로 돌아서 병조판서를 제수한다. 홍길동은 서울에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 고국을 떠나 남경으로 가다가 율도국을 발견한다. 그곳의 왕이 되어 나라를 다스린다.


한 가지 의문이 든다. 홍길동은 왜 율도국의 왕이 되었을까. 고국의 왕이 될 수는 없었을까. 저자가 허균이라서 생기는 아쉬움이다. 자유분방한 삶과 파격적인 학문으로 대변되는 시대의 이단아. 정치인으로서 삶도 굴곡의 연속이었다. 거리낌 없는 언행으로 사류(士類)의 배척을 받아 여섯 번이나 파직과 복직을 반복했다. 허균은 위축되지 않았다. 오히려 대북세력의 전면에 나서서 인목대비의 폐비를 주장하는 등 정치적 무리수를 감행했다. 인목대비는 폐위돼 서궁(西宮)에 유폐됐다. 하지만 허균 또한 이 일로 상당수 여론으로부터 배격됐다. 정치적 동지였던 기자헌의 아들 기준격으로부터 역모 혐의로 고발되기에 이르러 끝내 처참한 죽음을 맞는다.

김탁환이 쓴 소설 '허균, 최후의 19일'은 그 마지막 순간을 자세하게 조명한다. 깊은 절망 속에서 희망을 좇는 의지를 부각하며 허균의 혁명가다운 면면을 펼친다. 일반적인 대화에서도 투철한 주체성을 엿볼 수 있다. 도성의 밤 풍경을 바라보며 박치의와 나누는 대화가 그러하다. 홍길동전을 두고 솔깃한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자네가 보내 준 소설은 잘 읽었네. '삼국지연의'나 '수호전'만큼 거창하지는 않았지만 썩어 빠진 이 나라의 현실을 잘 그린 것 같으이. 한데 한 군데 마음에 들지 않는 곳이 있더군."

"그게 어딘가? 그 소설의 주인공이 바로 자넨데, 자네가 싫다면 고쳐야겠지."

"주인공이 왜 난가? 홍길동전은 자네가 10년도 전에 써 둔 것이 아니었나?"

"그때 써 두긴 했지만, 북삼도를 누비고 다니는 박두령을 보며 많이 고쳤다네. 홍길동전이 아니라 '박치의전'으로 할까 생각도 해 보았었지. 그나저나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어딘가?"

"율도국 말일세.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바로 이 땅에 율도국을 세워야 하지 않겠나?"

"그렇군. 자네 말이 맞네. 딴 곳은 퇴고를 했는데, 율도국 부분은 10년 전 그대로야. 조선을 율도국으로 만드는 것으로 바꿈세."


충분히 있었을 법한 문답이다. 그 무렵 조선은 끝없는 당쟁으로 국론이 지리멸렬되어 권력의 악순환을 반복했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사류의 정치 및 경제 갈등이 극도로 표면화됐다. 서얼 금고법으로 서얼들의 사회참여 길이 막혔고, 서민들에 대한 처우 또한 악화됐다. 광해의 혼정(昏政)마저 도를 지나쳐 저항의 목소리가 커갔다. 허균은 홍길동전을 통해 조선 사회가 안고 있던 문제들을 과감하게 폭로했다. 성리학의 철학 논쟁에 빠져 들지 않고 다양한 사상을 접해온 덕에 가능한 접근이었다.

그는 오랜 역사 속에서 민중의 힘을 발견했다. 그 저력과 잠재력을 '호민론'에 고스란히 담으며 "천하에 두려워해야 할 바는 오직 백성뿐"이라고 했다. 군주에게 절대적 충성을 강요하던 현실에서 백성의 존재 의미를 부각하면서 개혁을 요구했다. 여기서 주체는 부당한 대우와 사회 모순에 과감하게 대응하는 '호민(豪民)'이다.


"대저 호민이란 몹시 두려워해야 할 사람이다. 호민은 나라의 허술한 틈을 엿보고 일의 형세가 편승할 만한가를 노리다가 팔을 휘두르며 밭두렁 위에서 한 차례 소리 지르며, 저를 '원민(怨民ㆍ피해를 입고도 원망하지만 시정 의지가 없는 백성)'이란 자들이 소리만 듣고도 모여들어 모의하지 않고도 함께 외쳐대기 마련이다. 저들 '항민(恒民ㆍ자신의 권리나 이익을 주장할 의식이 없는 백성)'이란 자들도 역시 살아갈 길을 찾느라 호미, 고무래, 창자루를 들고 따라와 무도한 놈을 쳐 죽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호민론에서 호민은 원민, 항민과 함께 무도한 무리를 물리친다. 허균은 이를 통해 국왕은 백성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백성 위에서 군림하지 않는다고 역설한다. 그는 호민을 한나라의 고조나 고려 태조와 같은 창업주로 보지 않는다. 황건적이나 견훤처럼 묘사한다. 다수 학자들은 진정한 혁명가로서 한계를 드러내는 대목이라고 지적한다. 왕을 대상으로 이론을 자유로이 펼 수 없었던 시대의 제약에 부딪혔다고 평가한다. 물론 절대적 왕권에 대한 도전 의사가 없더라도 호민이 왕을 포함한 지배 계층에게 중대한 위협이 될 수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홍길동이 율도국의 왕이 된 것 또한 다르지 않다. 그런데 김탁환은 허균이 이보다 더 진보된 세계관을 가졌을 거라고 추정한다.


"교산! 자넨 율도국의 임금이 되고픈가?"

"아니, 난 그럴 뜻이 없네. 임금이라니? 그렇게 골치 아픈 자리는 줘도 안 하겠어."

"그렇다면 왜 홍길동을 율도국의 임금으로 세워 놓았는가? 아버지인 홍승상을 태조 대왕으로 추존하는 것도 눈에 거슬렸어."


(중략)


"우리가 반정을 하는 거라면 당연히 용상의 새 주인을 고려해야 하겠지만, 용상, 뭐 그까짓 게 필요할까 싶으이. 10년 전에는 요순 같은 임금을 세워 나라를 새롭게 바꿀 수도 있지 않을까 잠깐, 아주 잠깐 생각했었거든."

"광해를 염두에 두었단 말이지?"

"그래. 하지만 이제 미련을 완전히 버렸다네. 마지막 퇴고를 할 때 율도국을 조선으로 옮기면서 용상이라는 말 자체를 소설에서 빼겠네. 그럼 되겠는가?"


새로운 왕을 옹립해 왕조를 다시 세우는 것이 모순을 되풀이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역설. 이 대화가 허균이 최후를 맞이하기 보름 전에 배치돼 숨겨온 진심처럼 전해진다. 김탁환이 생각하는 허균은 왕이 없는, 완전히 다른 세상을 꿈꾼 혁명가다. 역설적이게도 그 힘은 절망의 두께가 두꺼웠기에 나올 수 있었다. 그 틀을 깨고 피어난 희망이 조금 더 오래 지속됐다면 어땠을까. 지금보다 사회는 더 진보하지 않았을까. 율도국이라는 이름으로.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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