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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은 처음이라] 독립운동에 뛰어든 법조인들②조선 3대 민족인권변호사

최종수정 2019.03.10 19:06 기사입력 2019.03.10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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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은 처음이라'는 법알못(알지 못하는 사람)의 시선에서 소소한 법 궁금증을 풀어보는 코너입니다. 법조기자들도 궁금한 법조계 뒷이야기부터 매일 쓰는 사건 속 법리와 법 용어까지 친절하게 설명해드립니다.


이번 '법은 처음이라'도 법조인 출신 독립 운동가 2편입니다. 먼저 1편에서는 법조인 출신으로 직접 독립운동에 뛰어든 이준 열사와 박상진 의사를 소개해드렸습니다.


2편에서는 '독립운동가의 변호인', '조선의 3대 민족 인권 변호사'로 불린 허헌·김병로·이인의사(출생 연도순)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3·1운동 지도부의 낮은 형을 이끌어 내다…긍인(兢人) 허헌(1885~1951)
[법은 처음이라] 독립운동에 뛰어든 법조인들②조선 3대 민족인권변호사


허헌은 우리나라 독립운동가 중에서도 유명하지 않은 인물입니다. 그가 민족인권 변호사들과는 달리 광복 이후 북한에 올라가 공산주의 활동을 했기 때문입니다. 일본 메이지대학 법학부 법과를 졸업한 허헌이 민족인권 변호사로 유명해진 때는 1919년 3·1운동 이후입니다. 민족 지도자들에 대한 무료 변론에서 일제의 허를 찔러 비교적 낮은 형을 선고받게 했습니다.


일제는 독립선언서를 낭독 배포한 것을 폭동으로 규정하고 민족대표 33인 등 47명에게 내란죄를 적용했습니다. 고등법원은 내란죄가 아니라면서 지방법원으로 송치했습니다. 송치는 수사기관이 피의자와 관련된 증거와 서류를 다른 기관으로 옮길 때 쓰는 말입니다. 허헌은 송치라는 문장을 명확히 밝히지 않아 무죄로 종결된 것으로 주장한다. 그리고 무죄로 종결됐으니 재판은 진행돼선 안된다는 ‘공소불수리’를 신청하게 됩니다. 이 때문에 일제 법원도 47인에게 낮은 형을 선고하고 재판을 끝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울러 노동자와 빈곤층에 대한 변호 활동에 관심을 둔 허헌은 임금투쟁, 부당해고 관련 소송 분야에 적극 참여해 하층민과 당시 조선인 변호사들의 신망을 얻었습니다. 1925년에는 조선변호사회 회장으로 선임됐습니다. 이 시기 조선공산당 창당에 가담하고, 조동호, 조봉함이 상하이 일본 영사관에 체포되자 무료 변론을 필치기도 했습니다. 1927년에는 국내 최대이자 좌우 합작 항일운동 단체인 신간회의 중앙위원장으로 활동했습니다.


1929년 광주 학생운동의 정신을 알리고자 신간회 중심으로 조선인대회를 계획하기도 합니다. 일제의 발각으로 3년여동안 옥고를 치루기도 합니다. 변호사 자격이 박탈된 그는 향후 칩거생활에 들어가게 됩니다. 또한 태평양 전쟁이 심화되던 1943년 외국 단파방송을 몰래 청취하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혀 고문을 받고 옥고를 치룹니다.


허헌은 광복 후 여운형이 주도한 건국준비위원회를 도우며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로 갈라진 남북의 정국을 수렴하려고 노력했습니다. 1946년에는 ‘남조선 노동당’의 위원장으로 선출됐습니다. 남북정치지도자 연석회의가 1948년 김구·김규식과 등과 북한으로 건너갔습니다. 이후 김구와·김규식은 남한으로 돌아왔지만 허헌은 돌아오지 않고 요직을 두루 맡았다가 1951년 급류가 그를 태운 배를 휩쓸어 익사하게 된다.

청년 민족변호사에서 한국 사법의 아버지가 된 가인(街人) 김병로(1888~1964)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사진출처=연합뉴스]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사진출처=연합뉴스]



일본 메이지 대학 야간부 법학과를 졸업하고 조선으로 돌아와 경성전수학교, 보성법률상업학교 형법·소송법 강사로 활동하던 김병로가 본격 독립운동에 뛰어든 건 1919년 경성지방법원 소속 변호사로 개업한 이후입니다. ‘독립운동은 무죄’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던 그는 1923년 허헌·김용무·김태영과 서울 인사동에 형사공동연구회를 차렸습니다. 표면은 형사법과 변론을 연구하는 단체였지만, 사실상 항일변호사들의 공동전선이었고, 독립투사 무료 변론소의 역할을 했죠. 이 당시 이인·허헌 변호사와 함께 조선국 3대 민족인권 변호사로 이름을 떨치게 됩니다.


김병로는 10여년 동안 한국 근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은 물론 조선인들의 권익을 위한 변호를 맡았습니다. 여운형·안창호 등이 연루된 치안유지법위반사건, 김상옥의사 사건, 광주항일학생운동, 6·10만세운동 등 수 많은 독립운동 사건의 변론을 진행했고, 일제의 소작제도로 피해 받던 농민들의 구제 활동을 합니다. 그는 또 동시에 신간회 활동을 했습니다. 1927년에는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신간회가 해체되고 독립운동 등 사상사건(思想事件)의 변론제한이 생기자 1932년 경기도 양주군에 내려가 농사를 지었습니다. 이후 독립될 때 까지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일본의 배급도 받지 않았던 것도 그의 강단을 보여주는 일화로 유명합니다.


김병로는 1945년 광복을 맞은 후 사법부 독립을 위해 힘씁니다. 1948년 국무회의의 만장일치로 초대 대법원장으로 임명된 그는 이승만 전 대통령과의 마찰도 유명합니다. 친일파 처벌에 미온적이었던 이 전 대통령은 반민족행위자 처벌법의 공소시효를 단축하려는 시도를 했지만, 김 전 대법원장이 반민특위 특별재판부장으로서 반대했습니다. 경찰은 결국 반민족행위자특별조사위를 습격해 버렸고, 김 전 대법원장은 “이번 사건은 상부의 명령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며 “불법행위에 대해 사법기관에 판단을 요구해 온다면 법에 비춰 추호도 용서 없이 판단하겠다”고 일갈합니다. 사사오입 개헌 이후 김 전 대법원장은 “절차를 밟아 개정된 법률이라도 그 내용이 헌법 정신에 위배되면 국민은 입법부의 반성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공식 비판합니다. 또한 국회 프락치 사건, 윤재구 의원 재판 등을 두고 이 전 대통령은 1956년 국회 연설을 통해 사법부를 비난하자, 김 전 대법원장은 “이의 있으면 항소하시오”라고 반박했습니다.


그는 초대 대법원장으로 9년3개월 재임기간 동안 일본법을 번역한 수준의 법률을 넘어선 한국만의 법체계를 만드는 데에도 기여합니다. 그는 대법원장으로 부임하며 법전 편찬위원회 위원장도 함께 맡았습니다. 피고인의 인신 구속기간을 정한 것도 그의 작품입니다. 외국에서는 사안에 따라 5년~10년도 걸릴 수 있는 형사재판을 단축시켰고, 이는 피고인의 방어권 보장으로 이어졌습니다. 신의성실의 원칙, 권리남용 등을 우리민법에 적용하면서 민법 기틀을 만들었습니다.


황옥경부 사건무죄 변론·한글을 사랑한 변호사…애산(愛山) 이인(1896~1979)
이인 초대 법무부 장관[사진출처=법무부]

이인 초대 법무부 장관[사진출처=법무부]



이인은 1922년 일본변호사시험에 합격한 후 1923년 서울(당시 경성)에 변호사사무소를 냈습니다. 그가 최초로 변론한 사건은 제 2차 의열단 사건으로 알려진 ‘황옥경부 폭탄 사건’입니다.


영화 ‘밀정’으로도 유명한 사건이죠. 의열단 단원인 김시현은 대규모 암살파괴거사를 준비하기 위해 서울로 폭탄과 무기를 반입하고자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의열단원이던 경기도 경찰부 고등과 소속 경부(=경찰)인 황옥이 협조하게 됐습니다. 폭탄·무기 반입은 성공했지만 김시현 등 의열단원은 같은 의열단원이었던 김재진의 밀고로 인해 체포됐습니다. 황옥은 1923년 공판에서 자신이 의열단을 체포하기 위해 잠입했다고 주장해 논란을 일으킨 바 있습니다. 변론에 따른 거짓진술이라는 분석이 많지만 황옥의 주장처럼 황옥이 의열단 체포를 위해 잠입한 경찰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습니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이 사건에는 여러 항일변호사들이 변론에 참여했습니다. 변호사들 중에서도 감형론을 주장하는 측과 무죄론을 주장하는 측이 나뉘었습니다. 이 가운데 이인은 무죄를 주장해 변론을 펼쳤고, 이후 독립운동가들의 신임을 얻게 됩니다. 이인은 그 이후 안창호사건, 6.10 만세사건, 대구 조선은행금고 폭파미수사건 등의 약 1500여 건의 변론을 진행했습니다. 이 당시 허헌, 김병로를 비롯한 조선 변호사들과 함께 독립운동가들을 위한 무료변론을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한글사랑도 남달랐습니다. 그는 조선어연구회(조선어학회)에 1926년부터 회원으로 활동하며 옥고를 치루기도 합니다. 조선기념도서출판관이 1935년 창설되자 창설 발기인으로 참여해 2대 관장을 맡기도 했습니다. 조선어학회에 깊이 관여하고 있던 그는 일제의 조선어학회 사건 당시 일제에 의해 모진 고문을 받고, 재판에 넘겨져 징역2년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재산 모두를 한글학회에 기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광복 이후 1948년 이승만 정부의 초대 법무부 장관을 지내면서 반민특위 위원장으로 활동하며 지지부진한 특위 활동과 위원장 시절 반민특위 해체로 인해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기민 기자 victor.le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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