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비비]WTO규정만 고집해선 첨단산업 못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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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업계가 정부의 보조금 지원을 받기란 생각만큼 쉽지 않아 보인다. 지난달 말 한덕수 국무총리 주재로 열린 국가 첨단전략 산업 위원회에서도 반도체산업 경쟁력을 키우기 위한 보조금 지원 문제가 논의됐지만 참석자들의 난상토론에도 결론을 내지 못했다. 이 자리에선 세계적인 투자 보조금 경쟁이 거론된 것으로 전해졌는데, 이를 참고해 지속적으로 검토하기로 했다고 한다. 하지만 말 그대로 검토일 뿐이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반도체 업계의 간절함과는 온도 차가 느껴졌다는 반응이다.


한국 정부는 첨단산업 보조금 지급에 유독 주저하는 모습이다. 미국이 2027년까지 71조원을 푸는 것을 비롯해 일본 35조원, 중국 63조원 등을 반도체 산업에 쏟아붓는다. 글로벌 반도체 업계가 그야말로 ‘쩐의 전쟁’을 치르고 있다. 한국은 ‘보조금 무풍지대’에 머물고 있다.

보조금 지급에 눈치를 보는 건 대기업 특혜 논란보단 세계무역기구(WTO) 규정을 의식한 측면이 오히려 크다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는다. 국가 간 자유무역을 지향하는 WTO는 특정 산업이나 기업에 보조금을 지급하는 걸 금지하고 있는데, 우리 정부가 가장 민감하다는 것이다.


외교부 웹사이트에 공개된 ‘보조금 및 상계조치에 관한 협정(WTO 국문 협정)’을 보면 보조금을 지급한 국가에 대해선 피해국이 상응 조치를 할 수 있게 돼 있다. 특정 산업이나 기업에 보조금을 지급해 다른 나라 산업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면 상계관세를 부과할 수 있다. 소위 ‘조치 가능 보조금’ 규정이다. 규정대로라면 우리 정부가 보조금을 국내 산업에 지원할 경우 오히려 미국 등에서 관세를 부과 당하거나 제소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게 정부 논리다. 미국 상무부가 인텔에 돈을 풀어도 미 무역대표부(USTR)는 우리 정부의 보조금을 문제 삼을 수 있다는 얘기다. 반도체 경쟁국이 보조금을 자국에 풀어도 통상 분쟁은 이와 별개라는 이유 때문이다. 물론 반대로 우리가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다.

또 사이클 산업 특성상 반도체 공급 과잉이 도래할 경우 보조금이 무역 보복의 빌미가 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보조금 지급 대상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국내 기업이라는 점도 걸림돌이다. 특정 산업은 물론 자국 기업 지원으로 간주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은 삼성전자와 대만 TSMC에 보조금을 지급할 태세고 일본 정부는 TSMC에 보조금을 지급하기로 했다. 자국 기업만 지원해 상대국에 손해를 입힌다고 지적할 땐 우리가 불리할 수 있다는 게 정부 주장이다.


우리나라는 1995년 WTO 체제 출범 후 자유무역의 수혜를 입은 게 사실이다.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과 달리 WTO는 분쟁 해결을 위한 상소기구를 설치해 보조금으로 피해를 준 국가를 제소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WTO의 위상이 약화했고 각국이 보호무역을 강화하고 있다. 경쟁국이 퍼주기 경쟁에 나선 상황에서 보조금 효과가 나타난 이후 우리가 피해를 보았다고 WTO에 호소하는 건 ‘사후약방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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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TO의 가장 큰 특징인 상소기구는 현재 무력화됐다. 회원국 각료들이 올해 말까지 상소기구를 정상화하기로 했지만 진척은 없다. 7명의 상소기구 위원 임기가 모두 만료됐고, 후임은 한명도 선임되지 않은 상태다. WTO 규정에 매몰돼 산업지원이 실기하지 않길 바랄 뿐이다.


최일권 산업IT부장 igchoi@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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