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동시각]대포통장 규제의 역설
보이스피싱 막으려 도입한 '한도제한 계좌'
소비자 구별 없는 획일적 규제에
정상 거래 고객만 '잠재적 범죄자' 취급
AI 시대에 갇힌 은행권의 업무 편의주의
스스로 고객 밀어내는 꼴
금융투자업계에 종사하는 지인으로부터 전화가 한 통 걸려 왔다. 과거 A은행에서 가입한 적금이 만기를 맞았지만 계좌가 한도제한 계좌로 묶여 있어 목돈을 한 번에 찾지 못했다는 하소연이었다. 계좌 한도를 풀기 위해 재직증명서와 근로소득원천징수영수증까지 꼼꼼히 챙겨 은행 창구를 찾았지만 "적금 해지는 한도 해제 사유가 아니다"는 답만 되돌아왔다. 십수 년째 거래한 장기 고객이라는 점도 소용없었다. 은행 측이 제시한 사실상 유일한 방법은 타행 급여통장을 해지하고 해당 은행으로 주거래 계좌를 옮기는 것이었다. 빈손으로 은행을 나오면서 그는 A은행과는 다시는 거래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물론 한도제한 계좌 제도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보이스피싱과 금융사기 수법이 갈수록 정교해지는 상황에서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보이스피싱 피해액이 1조원을 넘어섰다는 점을 고려하면 금융당국과 은행권이 계좌 개설과 이체를 엄격히 관리하려는 이유 역시 납득이 간다.
한도제한 계좌는 원래 금융거래 목적 확인에 필요한 객관적 증빙서류를 제출하기 어려운 이용자들을 위해 2016년 도입됐다. 그 배경에는 2012년 시행된 '금융거래 목적 확인 제도'가 있다. 대포통장 근절을 위해 입출금 통장 개설 시 거래 목적을 확인하도록 한 제도다. 신규 계좌나 거래 이력이 부족한 계좌에 이체 한도를 설정해 범죄 조직이 자금을 한꺼번에 빼돌리는 것을 막겠다는 취지였다.
문제는 제도 자체에 있지 않다. 위험 수준이나 거래 이력을 충분히 구분하지 않은 채 모든 고객에게 사실상 동일한 기준을 '일률 적용'하는 현재의 운영 방식이 도마 위에 오른 것이다. 현장에서는 정상적인 금융 생활을 해온 소비자들까지 과도한 제약을 받고 있다는 불만이 끊이지 않는다.
한도 해제 기준도 은행마다 제각각이다. 어떤 은행은 급여 이체 실적을 요구하고 다른 곳은 공과금 자동이체나 카드 사용 실적을 조건으로 내건다. 일정 기간 이상의 거래 실적을 요구하는 사례도 있다. 실제 명의를 가진 사람이 계좌를 정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한 절차다.
하지만 일부 소비자들 사이에서는 한도 해제 조건이 사실상 고객 확보를 위한 영업 수단처럼 운영되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나온다. 한도 해제 조건으로 급여 통장 개설, 금융상품 가입 등을 요구하는 행태 때문이다. 소비자 보호를 위해 만든 제도가 은행의 영업 논리와 뒤섞이는 순간 소비자 신뢰는 흔들릴 수밖에 없다.
은행권 입장도 이해 못 할 일은 아니다. 금융사고가 발생하면 책임론이 거센 만큼 보수적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다. 자칫 규제가 느슨해질 경우 범죄 조직에 악용될 수 있다는 우려 역시 타당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소비자를 잠재적 범죄자처럼 취급하는 방식이 '지속 가능한 해법'일 수는 없다. 신규 계좌나 이상 거래 패턴이 감지된 계좌와 수년간 안정적인 거래 이력을 쌓아온 고객을 동일한 기준으로 묶는 것이 과연 합리적인지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미 은행들은 고객의 소득 흐름과 소비 패턴, 거래 이력 데이터를 충분히 축적하고 있다. 인공지능(AI) 등 디지털 기술이 고도화된 시대에 여전히 획일적 규제에만 의존하는 것은 시대 흐름과도 맞지 않는다.
꼭 봐야 할 주요 뉴스
"주식은 세금 안 내는데" 내년부터 年 250만원 넘...
금융 범죄 예방은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지금의 제도가 소비자를 보호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소비자를 지치게 만들고 있는 것인지 금융권 스스로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가뜩이나 주식시장과 투자 플랫폼으로 돈이 이동하는 '머니무브' 시대다. 고객 한 명이 아쉬운 상황에서도 은행들이 여전히 업무 편의주의와 획일적 기준에 갇혀 스스로 고객을 밀어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볼 때다.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