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봉·성과급 9000만원 받아도 많단 생각 안들어"…70대 1 뚫어 '늦깎이 신입'[과학자가 사라진다]③
35세에 얻은 첫 안정적인 직장
"친구들은 부장인데 나는 이제 신입"
출연연 경쟁률 '바늘구멍'
불확실한 미래에 "제자에게 박사 권하기 무섭다"
"저는 그나마 잘 풀린 경우예요."
대전의 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인 K 연구원에서 근무하는 박성훈(가명·38) 씨는 담담하게 말했다. 1988년생인 그는 대학 졸업 뒤 석·박사 과정을 거치고 2년간의 박사후연구원(Postdoctoral researcher·포닥) 생활 끝에 35세가 돼서야 처음 안정적인 직장에 들어왔다. 현재 4년 차 연구원으로 근무 중인 그는 가장 왕성하게 연구해야 할 시기에 '생존'을 먼저 고민해야 했던 시간을 떠올렸다.
박 씨의 사례가 최악의 사례는 아니다. 본인 표현대로 "그나마 잘 풀린 경우"에 속한다. 같은 시기 박사과정을 밟다 산업계로 방향을 튼 동료나, 포닥 생활을 5년 넘게 이어가며 여전히 '다음 계약서'를 기다리는 후배들이 많다.
'30대 1'은 기본, 특정 직군은 '70대 1'…바늘구멍 된 출연연
그가 정규직 자리를 잡는 과정은 그야말로 '바늘구멍'이었다. 최근 정부출연연구기관의 채용 문턱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아졌다.
국가과학기술연구회(NST)에 따르면, 통합 채용이 정착된 최근의 추세를 볼 때 매번 수천 명의 박사급 인력이 몰리고 있다. 2025년 상반기 출연연 공동채용의 경우, 약 5800명이 지원해 단 186명만이 정규직으로 선발됐다. 평균 경쟁률만 31대 1에 달한다.
박 씨는 "모든 지원자가 박사학위 소지자라는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수치"라며 "특히 전공자가 몰리는 특정 인기 직군에서는 체감상 70대 1에 가까운 경쟁률을 보이기도 한다"고 전했다.
취업문이 좁아지다 보니 해외 포닥을 떠나는 것조차 이제는 모험이 됐다. 박 씨는 "예전에는 미국 포닥 2~3년이 필수 스펙이었지만, 지금은 그사이 국내 자리가 다 사라질까 봐 해외로 나가지 못하고 국내에서 단기 계약직을 전전하는 후배들이 많다"고 했다.
"가장 오래 공부했지만, 삶의 기반은 가장 늦게"
박사급 연구원들은 경제적 보상 차이와 함께 '시간의 격차'에서 오는 박탈감을 느낀다. 어렵게 출연연에 안착했지만, 먼저 사회에 나간 친구들과 비교하면 삶의 궤적이 10년 가까이 뒤처져 있기 때문이다. 가장 열심히 공부하고 가장 늦게 사회적 자립을 시작하는 구조인 셈이다.
현재 38세인 박 씨의 연봉은 성과급을 포함해 9000만 원 안팎이다. 일반 직장인에 비해 높은 수준 같지만 그는 "기회비용을 생각하면 결코 많다고 느끼기 어렵다"고 말했다.
"대기업에 간 친구들은 이미 차장, 부장 직급을 달고 자녀 교육과 내 집 마련 등 삶의 기반을 다 닦아놨어요. 저는 이제야 안정적인 월급을 받으며 출발선에 섰는데, 그 친구들과 비교하면 인생의 황금기를 연구실에서 불안과 맞바꾼 기분이 듭니다."
"끊어지는 연구 선순환… '제자에게 차마 권하지 못하는 길'"
지방의 한 대학 연구실 모습. 박사과정 진학 감소와 산업계 쏠림이 이어지면서 일부 연구실에서는 대학원생 충원 자체가 어려워지고 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김종화 기자
원본보기 아이콘더 큰 문제는 이 불안이 세대를 넘어 전이되고 있다는 점이다. 박 씨는 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학교(UST)에서 석사생들을 지도하고 있지만, 제자들에게 박사진학을 선뜻 권하지 못한다.
"예전에는 '버티면 자리가 난다'고 말해줄 수 있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5~7년의 박사 과정을 마친 뒤 제자들에게 어떤 미래가 기다릴지 저조차 장담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현장에서는 장기 연구가 필요한 박사과정 대신, 졸업 후 곧바로 고연봉을 받을 수 있는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 등 산업계로 향하는 학생이 급증했다. 연구실의 인력 선순환은 이미 멈춘 상태다. 박 씨는 "재작년에는 신입 연구원을 받았지만 작년엔 뽑지 못했다"며 "후배가 들어오지 않는 연구실은 결국 생명력을 잃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개인의 고통을 넘어 '연구 생태계'의 균열로
산업계로의 인재 이동을 무조건 부정적으로 볼 수는 없지만, 대학과 출연연이 담당해야 할 기초 연구 인력이 '불안' 때문에 떠밀리듯 나가는 상황은 교정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김추강 국가과학기술인력개발원(KIRD) 경력성장실장은 "포닥 기간의 장기화와 늦은 사회 진출은 개인의 처우 문제를 넘어 연구 생태계의 지속 가능성을 무너뜨리는 신호"라고 진단했다. 우수한 인재들이 연구 현장을 떠나거나 진입 자체를 포기하는 현상이 고착화되면, 결국 국가 기초과학의 뿌리가 약해질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박 씨는 씁쓸하게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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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박사학위가 연구자로서의 안정을 보장하는 훈장이었지만, 지금은 더 긴 불안의 출발점처럼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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