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영국의 소설가이자 수필가 버지니아 울프는 영미 모더니즘 문학에서 중요한 작가로 평가받는다. 그녀가 발표한 소설, 단편, 에세이 가운데 많은 작품이 특유의 혁신적인 스타일과 심오한 필력을 바탕으로 현대문학의 고전이 됐다. 울프는 거의 매일 산책을 했고, 이를 바탕으로 많은 글을 썼다. 그중 <밤 산책>은 1905년 여름 잉글랜드 남부 세인트아이브스 근처 해안에 머물며 쓴 일기를 발전시킨 글이다. 윤교찬·조애리 교수가 번역한 <걷기의 즐거움>에서 발췌했다. 글자 수 1047자.
[하루천자]버지니아 울프의 ‘밤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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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순간들이 자주 다가왔고 옆에 같이 걷던 사람조차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것 같았다. 일행들은 사방에 어둠이 엄습하는 것을 느끼면서 점차 어둠을 받아들이며 각자 걸어가기 시작했고, 땅 위를 움직이는 몸뚱어리는 넋 나간 듯 떠다니는 영혼과 분리된 듯했다. 심지어 길조차 우리 뒤편으로 사라지게 되자 우리는 길의 흔적도 사라져버린 어둠의 밤바다를 몸으로 부딪치며 나아갔다. 목적지를 향해 나아간다는 이 표현을 대낮의 들판을 다시금 가로질러 나가야 하는 우리의 불확실한 행진에 써도 된다면 말이다. 땅이 분명히 바닥에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이따금 바닥을 발로 디뎌보는 편이 바람직할 정도였다. 눈과 귀는 완전히 봉인된 상태였고 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에 눌려서 아무런 감각 기능도 하지 못했다. 엄청난 노력 끝에야 저 아래로 불빛 몇 개가 겨우 눈에 들어올 정도였다. 하지만 낮에 보이던 것들을 지금 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한 대 맞았을 때 눈앞에 보이는 별처럼 상상 속의 광경인지도 알 수 없었다. 저 멀리 계곡의 아련한 어둠 속에서 마치 떠 있는 듯 보이는 불빛들이 분명 우리의 눈에 들어왔다. 눈으로 불빛을 확인하자, 머리가 깨어나 불빛이 자리할 세상의 모습을 그려냈다. 분명히 저 아래로 언덕이, 그 밑에는 마을이, 그리고 그곳으로 가는 길이 구불구불 나 있었다. 세상 모습을 그리는데 불빛 열두 개 정도면 충분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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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이런 기이한 분위기에 익숙해지자 엄청난 평화로움과 아름다움이 눈에 띄었다. 마을 속 구체적 형체들의 환영과 기운이 밖에 떠다니는 듯했고, 언덕이 있던 곳으로 구름 모습이 보였고 집들 역시 불꽃 모습으로 눈에 들어왔다. 우리의 시선이 거친 실체 모습의 외관을 스쳐 가는 것이 아니라 깊은 어둠 가운데서 새롭게 눈을 씻고 생기를 되찾게 된 것이다. 끝없이 다양한 모습을 한 대지는 모호한 공간 속으로 녹아들었고, 새롭게 생기를 찾아 예민해진 우리의 시야에는 담벼락도 너무 낮아 보였고, 등불의 뿜어내는 빛도 섬광처럼 너무나 눈부시게 다가왔다. 우리는 마치 새장에 갇혀 지내다가 이제야 해방되어 새롭게 날갯짓을 하는 새와 같았다.


-<걷기의 즐거움>, 수지 크립스 엮음, 윤교찬·조애리 옮김, 인플루엔셜, 1만6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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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인경 기자 ikj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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