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관의 세계인문여행]밀란 쿤데라를 읽는 3가지 코드…음악, 프라하, 그리고 프랑스어
프라하의 봄이 겨울로 얼어붙은 후 밀란 쿤데라(1929~2023)는 손발이 꽁꽁 묶였다. 체코에서는 책을 낼 수도 없고 도서관에서 책이 사라졌다. 쿤데라는 재즈카페 종업원으로 일하며 두 번째 장편소설을 썼다. ‘생의 저편에서’.
이 지점에서 프랑스 출판인 클로드 갈리마르가 등장한다. 1968년 파리 방문 때 알게 된 갈리마르는 프라하를 방문해 밀란을 만나곤 했다. 그가 ‘생의 저편에서’ 원고를 몰래 파리로 가지고 나와 파리에서 체코어로 출간했다. 그게 1973년이다.
1975년 그는 프랑스 브레타뉴 지방의 렌대학으로부터 교환교수 초청장을 받는다. 프랑스어를 어느 정도 할 줄 알았기에 주어진 기회였다. 그는 이 초청장을 근거로 당국으로부터 ‘프랑스 3년 거주 허가증’을 받는 데 성공한다. 그는 스코다 자동차에 옷가방과 책을 싣고 아내와 함께 프랑스 국경을 넘어 서쪽으로 서쪽으로 달려 브레타뉴에 이르렀다. 그곳의 렌대학에서 서툰 프랑스어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3년 계약이 끝났지만 그는 체코로 돌아가지 않았다. 대신 파리로 상경한다. 망명이었다. 체코 공산당은 쿤데라의 시민권을 말소했다. 아무런 연고가 없는 파리에서 그는 생존을 위한 글쓰기에 매달린다. 1979년에 파리에서 장편소설 ‘웃음과 망각의 책’이 나왔다. 체코어로 쓰고 곧바로 프랑스어로 번역되었다. 5년 뒤 나온 장편소설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다. 체코어로 나온 직후 프랑스어로 번역되었다. 이 작품이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때부터 쿤데라의 이름이 국내에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는 3년여 무국적 상태로 지내다 1981년이 되어서야 프랑스 시민권을 취득한다. 알려진대로 그는 여러 차례 노벨문학상 후보에 거론되곤 했다. 그는 세계 주요 언론에서 인터뷰 대상 영순위였지만 그를 인터뷰한 매체는 거의 없다.
그는 사생활 노출을 극도로 꺼렸다. 프라하 시절부터 그랬다. 파리의 집도 극소수만 알고 있었다. 40년 이상 파리에서 살면서도 한번도 그의 일상이 언론에 노출되지 않았다. 내가 ‘프라하가 사랑한 천재들’의 쿤데라편에서 제목을 <베일에 쌓인 보헤미안>라고 붙일 수밖에 없었던 배경이다.
그는 자기 고백록이 소설이란 이름으로 등장하는 것을 꺼렸다.
독자들이 작가의 삶을 통해 소설에 접근하는 것을 경계했다. 이 점에서 쿤데라는 2022년 노벨상 수상작가 아니 에르노와 대비된다. 에르노는 자신의 모든 연애 경험을 소설로 썼고, 그 사실을 공개한다.
그는 서면인터뷰에만 3~4차례 응했을 뿐이다. 대면 인터뷰는 항상 부정확하게 전달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그는 우려했다. 앙투안 드 고드마르와의 서면인터뷰가 국내에 번역되었다. 고드마르와의 서면인터뷰는 쿤데라 문학을 연구하는 이들에게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그는 프랑스를 지방을 먼저 경험하고 나중에 파리를 체험한 경우다. 브레타뉴 지방은 노르망디 서쪽, 대서양에 면해 있는 지역이다. 파리 기준으로 볼 때는 시골중 시골이다. 브레타뉴 지방에서의 3년이 자신의 프랑스화(化)에 도움을 주었다고 그는 생각한다. 파리와 관련, 그는 고드마르와의 서면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의 경우 내 작품에 대해 가장 현명한 해석이 내려진 곳은 프랑스였지요. 여기서 비로소 내 작품은 정치성의 껍질을 벗고 가장 문학적인 각도에서 이해될 수 있었습니다. 파리는 오랫동안 유럽의 두뇌였다가 오늘날에 와서는 프랑스의 수도 이상의 그 무엇이 되었지요.”
그가 조국을 떠난 것은 1975년 나이 마흔여섯. 이십대에 이향(離鄕)을 했어도 고향이 그리워지는 나이에 그는 조국을 등져야 했다. 비록 육신은 보헤미아 평원을 떠났어도 정신은 단 한 순간도 프라하를 떠날 수 없었다. ‘웃음과 망각의 책’을 펼쳐본다.
‘…나는 2~3년간 동안 참고 지내다가 내 차를 타고 갈 수 있는 한 멀리 서쪽으로 몰았다. 렌의 브르몽 마을에서 나는 제일 높은 아파트의 문이 동쪽, 즉 프라하 쪽으로 나 있음을 발견했다. 지금 나는 내 탑에서 그들을 바라보지만 그 거리가 너무 멀다. 다행히도 내 눈에 어린 눈물이 망원렌즈 역할을 하여 그들의 얼굴을 가깝게 볼 수 있다. 자 이제, 의심할 나위 없이 관심의 초점인 대시인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다. 비록 칠순이 넘었지만 그의 얼굴은 아직 수려하고 눈은 현명하게 반짝인다.…나는 15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가 프라하의 밤, 불빛에 비치는 똑같은 광경을 본다. 시인들의 책이 정부 창고에 갇히기 전, 그들은 모두 술병으로 가득한 커다란 테이블에 모여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는 갈 수 없는 프라하를 그리워했다. 그리고 파리에서 프라하를 상상했다. 책장에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꺼내 아무 페이지나 펴본다. 프라하의 풍경이 펼쳐진다. ‘웃음과 망각의 책’도 마찬가지다. 그의 작품 대부분은 프라하 망향가(望鄕歌)다.
1999년에 나온 ‘불멸’은 쿤데라가 프랑스어로 쓴 작품이다. 프랑스 망명 24년만에, 나이 일흔에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로 소설을 완성한 사람 쿤데라. ‘불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배경과 서사가 파리와 프랑스로 바뀌었다. 프랑스인이 그를 ‘프랑스 작가’라고 부르는 이유다.
이제 작품을 이야기할 때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같은 소설을 보면 독자들은 혼란스럽다. 헷갈린다. 처음에는 무슨 소설이 이래, 하는 반응이 나온다. 무슨 에세이 같기도 하다. 시점과 화자(話者)가 뒤죽박죽인 것처럼 보인다. 그동안 우리가 접했던 소설의 전개방식과 너무 달라서다.
토마쉬와 테레사를 중심으로 내러티브가 진행되다가 갑자기 또다른 주인공인 사비나와 프란츠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풀려나간다. 외과의사 토마쉬의 서사에서는 단지 몇 줄로 묘사되던 것이 프란츠와 사비나 편에서는 자세하게 설명된다. 독자들은 비로소 ‘아, 그랬구나’라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화자에 따라 다른 진실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독자들은 무릎을 친다.
이런 소설 기법을 다성적(多聲的) 기법이라고 한다. 쿤데라 문학의 독창적 양식이며 매력이다. 우리는 앞선 195회 ‘밀란 쿤데라의 고백’ 편에서 그가 어렸을 때 음악을 체계적으로 배웠다는 점을 기억한다. 쿤데라의 아버지는 레오쉬 야나체크의 제자였다. 음악은 어린 쿤데라가 가장 먼저 접한 예술 장르였다. 그의 문학은 음악의 축복 속에 서서히 성장해나갔다. 쿤데라 연구의 권위자인 크베토슬라프 흐바틱은 ‘밀란 쿤데라의 문학’에서 이렇게 쓴다.
“피아노 연주는 어려서부터 쿤데라 삶의 일부였다. 음악은 쿤데라가 능숙하게 다룰 줄 알았던 첫 번째 예술 언어였다. 쿤데라의 소설 시학을, 특히 그의 소설 텍스트의 형식적 구성을 가까이서 관찰하게 되면, 이 형식적 구성이 음악으로부터 강한 영감을 받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이러한 의미에서 쿤데라는 음악이 소설에게 가르쳐주는 강의가 아직도 고갈되지 않았다고 여긴다.”
문학과 음악. 서로 다른 장르인 문학과 음악은 생각 이상으로 서로에게 깊은 영향을 주고받는다. 프리드리히 실러의 ‘환희의 송가’에 감동한 베토벤이 눈을 감기 직전 써낸 9번 교향곡 ‘합창’을 상상해보라. 이런 사례들은 일일이 다 열거하기 힘들다.
헤르만 헤세와 무라카미 하루키. 활동 시간과 공간이 각기 다른 두 사람은 음악에 일가견이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두 사람은 음악을 찬미했고, 따로 음악 에세이를 썼을 정도다. 하지만 음악적 특성을 소설 형식에 접목하고 그것을 고유한 서사 양식으로 확립한 사람은 아마도 쿤데라가 유일할 것이다.
쿤데라가 고드마르와 가진 서면인터뷰는 여러 면에서 그의 문학과 사상을 들여다보는 귀중한 자료다. 그중에서 내가 밑줄을 치며 읽으며 책에 인용한 대목은 이것이다.
“바보만이 만사에 대한 해답을 다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죠. 소설은 만사에 대해서 다 의문을 품는다는 점에서 현명한 장르입니다. 돈키호테가 자기 집 대문을 열고 세상으로 나서자 세상은 그의 눈앞에서 온통 질문으로 변해버렸습니다. 세르반테스가 그의 후손들에게 남긴 메시지는, 소설가란 그의 독자들에게 세상을 하나의 질문으로 이해하도록 가르쳐주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신성불가침의 확신들 위에 세워진 세계 속에서는 소설이 살지 못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소설은 그같은 확신들을 알기 쉽게 설명해주는 이야기가 되고 맙니다. 그것이야말로 소설 정신에 대한 배반이고 세르반테스에 대한 배반이죠. 레닌주의건 이슬람이건 그 무엇이건 전체주의적인 세계는 답의 세계일뿐 질문의 세계가 아닙니다.”
조성관 작가·천재 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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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니어스 테이블' 운영자, 전 주간조선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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