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43개국이 수출금지…‘경제 철의 장막’이 내려온다 [우크라 충격파③]
장크트갈렌대 사이먼 이브넷 교수
"보호무역 조치, 전쟁 후 43개로 급증"
2008년 금융위기 뒤 자국 이익 우선 확산
英 브렉시트·트럼프 대통령의 '미국 우선주의'
경제안보 중시, 보호무역주의 부활
[아시아경제 박병희 기자] 지난 25일 오후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WEF)에서 진행된 토론의 제목은 ‘경제적 철의 장막:시나리오와 함의(An Economic Iron Curtain:Scenarios and Their Implications)였다.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는 "우크라이나 전쟁이나 중국의 경기 둔화보다 더 두려운 것은 경제ㆍ정치적으로 파편화 추세가 강화되는 현실"이라고 말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후 세계 경제에 철의 장막이 다시 드리워지고 있다. 미국과 유럽연합(EU) 등 서방은 전쟁이 발발한 직후 강력한 대(對)러시아 경제 제재 조치를 취했다.
미국은 이미 러시아 원유와 가스 수입을 중단했고 EU는 2027년까지 중단할 계획이다. 러시아는 EU 대신 중국, 인도 등과의 교역을 넓히고 있다. 1991년 소련 붕괴로 냉전이 종식되면서 좌우를 가리지 않고 세계 교역을 확대해왔던 세계 공급망은 코로나19에 이은 러시아·우크라이나간 전쟁으로 붕괴 위기에 몰렸다. 전 세계가 각자도생의 길을 택하며 보호무역주의가 부활하고 있다.
◆보호무역주의 급증= 말레이시아는 다음달 1일부터 닭고기 수출을 금지한다. 세계 2위 밀 생산국이자 세계 최대 설탕 생산국인 인도는 지난 13일부터 밀 수출을 금지한 데 이어 연간 설탕 수출량도 1000만t으로 제한했다. 세계 1위 팜유 생산국 인도네시아는 지난 4월28일 팜유 수출을 중단했다가 지난 25일부터 수출을 재개했다.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는 전통의 우방이지만 원유 생산 확대를 두고 묘한 긴장 관계가 형성되고 있다. 미국이 거듭해서 원유 생산 확대를 주문했지만 사우디는 아랑곳 않고 있다. 마리오 드라기 이탈리아 총리는 지난 10일 조 바이든 대통령과 백악관에서 만났을 때 석유수출국기구(OPEC)에 대응하는 석유 수입국 카르텔을 제안했다.
제니퍼 그랜홈 미국 에너지부 장관은 지난 24일 바이든 대통령이 에너지 가격 상승을 막기 위해 에너지 수출 제한을 배제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IMF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한 뒤 식품이나 에너지, 기타 주요 원자재의 수출을 제한한 나라가 30여개 국에 달한다고 밝혔다. 이는 세계적으로 식량 위기가 극심해 수출 제한 조치가 급증했던 2008년의 33개국에 육박하는 수준이다.
스위스 장크트갈렌대학교의 사이먼 이브넷 교수는 별도로 보호 무역조치 통계를 집계하면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기점으로 올해 보호 무역조치가 급증했다고 밝혔다. 이브넷 교수는 올해 식품·비료와 관련된 수출 제한 조치는 47개인데, 이 중 43개가 전쟁 발발 뒤 발표된 것이라며 전쟁 전 보호 무역 조치가 매우 적었는데 전쟁 뒤 폭증했다고 말했다.
보호 무역주의 확산을 걱정하는 기업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미국 싱크탱크인 컨퍼런스보드와 유럽 기업인 이익 단체인 유럽재계원탁회의(ERT)가 지난달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유럽 대기업의 80%는 점점 더 많은 분야에서 국가안보가 최우선 순위가 될 것으로 예상했다. 자국 보호를 위한 보호 무역주의 확산에 우려를 나타낸 것이다.
컨퍼런스보의 일라리아 마셀리 선임 이코노미스트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따른 공급망 혼란이 전 세계적으로 보호 무역주의 경향을 강화시키고 있다"며 "중국, 유럽, 미국은 서로 의존도를 줄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세계주의 Vs 애국주의= 사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경제 위기가 거듭되면서 자국 이익을 우선시하며 통합을 거스러는 경향은 강화돼 왔다.
영국은 세계 금융위기 뒤 유로존 부채위기가 이어지자 2016년 국민투표를 통해 EU 탈퇴를 결정했다. 같은해 미국 대선에서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를 외친 강력한 보수주의자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트럼프는 2019년 9월 유엔 연설에서 "미래는 세계주의자(Globalists)가 아니라 애국주의자(Patriots)의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가 말하는 애국주의는 미국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영국 일간 파이낸셜 타임스는 지난달 프랑스 대선 구도가 전통적인 좌파와 우파 대신 세계주의자와 애국주의자 간의 대결로 대체됐다고 진단하기도 했다. 실제 대선 결선투표에서 중도 성향의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과 맞붙었던 극우 성향의 마린 르 펜 국민연합 후보는 "더 이상 좌파와 우파는 없다"며 "이제는 애국주의자와 세계주의자로 나뉜다"고 말했다.
진보와 보수를 상징하는 좌파와 우파라는 용어는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을 계기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역설적이었다. 마크롱 대통령은 EU가 통합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르 펜은 영국처럼 프랑스를 EU를 탈퇴해야 한다고 맞섰다.
이 같은 흐름은 미국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지난해 1월 취임하면서 미국이 국제 사회로 돌아왔다고 선언했다. 코로나19와 우크라이 전쟁을 거치며 경제안보, 공급망 확보의 중요성이 확대되면서 미국 역시 완전히 과거로 돌아가기는 어렵다는 분석이 나온다.
바이든은 지난해 12월 민주주의 정상회의까지 개최하며 기존 우방들과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또 중국에 대한 의존도를 끊고 자국 중심의 새로운 공급망 구축을 추진하고 있으며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인도ㆍ태평양 경제 프레임워크(IPEF)를 출범시켰다.
중국 관영 글로벌 타임스는 바이든의 국제 경제 정책은 민주당판 ’미국 우선주의‘라며 본질적으로 트럼프의 정책과 같다고 꼬집었다.
◆분열에 기름붓는 전쟁=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이같은 분열 흐름에 기름을 붓고 있는 격이라고 할 수 있다. IMF는 지난 22일 블로그에 세계 경제 파편화에 대한 우려를 나타냈다.
IMF는 냉전 종식 후 지난 30년 동안 자본, 상품, 서비스 및 인력의 흐름은 새로운 기술의 확산에 힘입어 세상을 크게 변화시켰다며 이러한 통합의 힘은 삶의 질을 높이고 세계 경제를 3배로 성장시키고 13억명의 사람들을 극심한 빈곤에서 벗어나게 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러시아의 침공은 세계 경제를 분열·파편화시키고 있다며 개발도상국은 선진국들에 물건을 팔아 부를 쌓는 것이 어려워질 것이라고 분석했다.
선진국도 제품을 구매하는데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할 것이며 이로 인해 인플레이션에 시달릴 것이라고 덧붙였다. IMF는 세계가 분열돼 기술의 교류가 중단되는 것만으로도 많은 국가의 국내총생산(GDP)이 5% 줄 수 있다고 추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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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 세계식량계획(WFP)은 우크라이나 전쟁의 장기화 영향으로 극심한 기아에 시달리는 인구가 2억7600만명에서 3억2300만명으로 4700만명 늘 것으로 추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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