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컬처] 내가 머리를 올려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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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체육이란 것을 그럭저럭 몇 개쯤 해 보았다. 배드민턴, 야구, 권투, 달리기 같은 것들이다. 잘해서 시작한 건 하나도 없고 재미있어 보여서 발을 들였다가 몇 달이나 몇 년쯤 하고 그만두었다. 핑계는 다양했다. 돈이 없어서, 시간이 없어서, 육아를 해야 해서, 흥미를 잃어서, 등등. 지금 하고 있는 건 달리기뿐이다. 아무리 돈이 없고 시간이 없고 아이들이 매달려도 지속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운동이니 계속하게 될 듯하다.


처음 무언가를 시작한 사람을 ‘뉴비’나 ‘꼬꼬마’라고 하고 그 반대편에 있는 숙련자는 ‘고인물’이라고 많이 부른다. 잘해보겠다고 애쓰는 뉴비의 어색한 모습을 보는 고인물들의 마음은 설렌다. 자신의 그 시절이 떠올라 그저 귀엽고 애틋하다. 그래서 이것저것 많이 도와주고자 한다. 장비를 물려준다거나, 자세를 교정해 준다거나, 아예 개인훈련을 봐 주기도 한다. 뉴비는 그러한 돌봄 속에서 성장하는 법이다. 나도 그러한 그들 덕분에 무엇이든 함께 즐길 수준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그러나 언젠가 누군가의 말에 마음이 상하고 말았다. “조금만 더하면 곧 내가 머리 올려줄 수 있어요.”


그는 나에게 자신이 가진 것을 아낌없이 주었다. 좋은 어른이기도 했기에, 나는 그 덕분에 운동뿐 아니라 삶의 진전을 함께 이루고 있던 참이었다. 그날도 그는 나에게 무언가를 주며 독려하는 참이었다. 조금만 더하면 된다고, 그러면 자신이 머리를 올려 줄 수 있다고. 나는 그 말을 언젠가 사극에서 들어보았던 것도 같다. 내가 이해하기로 그것은 남자가 여자에게 하는, 함께 첫날밤을 보내겠다고 하는 어원을 가진 표현이었다. 나도 그도 남성이었으나 성별과는 별개로 모욕적이었다. 관계라는 것은 언제나 일방적일 수는 없다. 결혼이라든가 하는 데 이르러서는 더욱 그렇다. 누가 누구의 머리를 올려주고 그의 삶을 종속하는 게 아니라 서로를 존중하는 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얼마 전에는 내가 아는 여성이 함께 운동하는 남성에게 같은 말을 들었다고 했다. 도와주겠다는 제안을 거절했더니 “내가 당신 머리 올려 줄 수 있는데.”라고 했다고. 그는 그와는 연락을 끊었지만 그 말이 역시 무척 모욕적이었다고 했다. 이성에게 듣기란 더욱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이 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머리를 올려주다’라는 말은 언젠가부터 굳어진 일반적인 것이라고 한다. 사극에서나 한 시대를 반영하기 위해 나와야 할 만한 이 표현은 21세기에도 여전히 동시하고 있다. 아니 그 전에, 이제는 누가 결혼했다고 그때부터 머리를 올리고 다니나. 이건 잘못된 것이다.


한 집단을 종속시키고 소외시키는, 그래서 모욕감을 주는 이런 표현들은 여전히 우리 주변에 많다. 여성가족부는 이제 사라질지도 모르겠지만 우리는 계속 살피고 고쳐나가야 한다. 적어도 이런 눈치라도 보면서 무엇을 없애야 한다는 말을 해야 하지 않겠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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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섭 사회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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