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자체로 책 전체 내용을 함축하는 문장이 있는가 하면, 단숨에 독자의 마음에 가닿아 책과의 접점을 만드는 문장이 있습니다. 책에서 그런 유의미한 문장을 발췌해 소개합니다. - 편집자주


작가의 두 번째 장편 소설로, 작가의 초기작 중에서도 가장 실험적인 글쓰기와 문체를 선보인 독특한 작품이다. 저자는 앞선 소설과 마찬가지로 여성과 노동자 계급에 천착한다. 문학을 통해 이 두 가지 지위가 사회적 규범 속에서 어떠한 역학 관계를 가지고 표리부동하게 작동하는지를 잔인할 정도로 ‘사회학적 자기 성찰’이자 ‘문학적 사회 과학’적으로 신랄하게 들여다본다.

[책 한 모금] 배반당한 청춘의 기록 ‘그들의 말 혹은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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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부모는 노동자니, 난 그들의 현재 모습이 아니라 그들이 말하는 것이 되어야만 한다. 여전히 지금도 교사가 되고 싶긴 하지만, 거기 도달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늘 걱정스럽게 바라보면서, 정말 신경질 나게 해, 아버진. 맨날 책에 코를 처박고 있으면 골치가 안 아프냐? 독서가 그의 강점은 아니다. 기껏해야 지역 신문 《파리-노르망디》나 읽고 중앙 일간지 《프랑스 수아르》를 조금 읽는 정도니. 가끔, 글을 읽을 때 방심하면 입술을 우물거린다. 어쩌면 그가 옳을지도. 공부는 너무 힘들다.


난 그가 이렇게 거칠게 행동하는 까닭이, 이를테면, 그가 다른 사람의 뒤를 이어받은 셈이어서 그러는 것임을 깨달았다. 틀림없이 그는 내내 생각했던 거였다. 난, 그가 이전에 함께 잤던 여자들을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가 그러는 이유는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는데, 그에게 난 남자를 밝히는 여자로만, 그것 말고는 다르게 보이지 않음을 느꼈다. 숙소로 날 만나러 와. 거절했다. 돌아가는 길에, 그는 내 마음에 들었던 그 여자 교관이 자기 여자라고 말했다. 걔 귀에 아무런 말도 들어가지 않는 편이 낫겠지만, 오, 뭐, 중요하지 않아. 처음으로 남자애들과 나 사이에 무시무시한 구렁이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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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말 혹은 침묵 | 아니 에르노 지음 | 정혜용 옮김 | 민음사 | 204쪽 | 1만4000원


서믿음 기자 fait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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