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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윤의 책섶]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쓴 투쟁의 기록

최종수정 2019.05.24 14:25 기사입력 2019.05.24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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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고통을 끌어 안고 살아낸 사람들의 고백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가까스로 생의 의지를 부여잡는 현대인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사진 = 아시아경제 DB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가까스로 생의 의지를 부여잡는 현대인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사진 = 아시아경제 DB


[아시아경제 김희윤 기자] 며칠 전, 주요 포털 사이트의 검색어 1위에 ‘주저흔’이란 단어가 등장했다. 일반인에게 낯선 이 단어는 법의학계에서 쓰이는 말로, 자살할 때 한 번에 치명상을 가하지 못하고 여러 번 시도 하다가 실패하면서 남긴 자해로 인한 손상을 뜻한다. 생과 사의 경계에서 치열하게 고민하다 끝내 스러지고 만 사람들이 남긴 몸의 유서인 셈이다.


2010년 이탈리아 볼로냐대 사회학 교수인 마르치오 바르발리는 종전까지 자살률 변화 원인으로 꼽힌 뒤르켐의 ‘사회적 통합’과 ‘규제’를 뒤집고 그 유형을 ‘누군가를 위한 자살’과 ‘누군가에게 대항하는 자살’로 재규정한 바 있다. 그는 과거와 달리 현대 사회에서는 집단이나 사회, 조직보다 문화적 요인과 심리학·정신의학적 변수가 자살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이 책은 고통을 끌어안으면서도 살기 위해 몸부림쳤던 사람들의 실제 사례를 통해 자살 기저에 숨은 정신질환의 위험성을 낱낱이 해부하고 있다.


문제있는 부모와 고통받는 자녀들


두 살 터울의 자매와 부모, 이 가정은 이웃에게는 더없이 행복한 가정으로 비쳤지만 실상은 학대, 특히 아버지의 완벽주의로 인해 가족이 고통받는 집이다. 아버지는 월남전 파병군인 출신의 괄괄한 성격의 사업가로, 자식이 딸 뿐인 게 못마땅해 둘째 딸 이름을 사내아이처럼 짓는가 하면, 아이들을 군대식으로 훈육하는 인물이다. 이런 아버지로부터 정신적·육체적 학대를 받은 첫째는 조현병을 앓으며 바깥출입을 삼가게 됐고, 둘째 또한 병원을 오가며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는 상황. 작가는 이들 자매가 아프게 된 원인으로 아버지의 자기애성 성격장애(NPD)를 지목했다.


자신은 공고한데 주변 사람들을 정신적으로 파괴하는 사람, 다른 사람의 감정과 의견에 좀처럼 공감하지 못하며 감정 이입을 모르는 사람. 작가는 이 NPD를 가진 사람들은 정작 자신의 문제를 모르거나, 알고도 숨기는 데 그치며, 정신병원에 가야 할 이들이 가지 않음으로 인해 오히려 주변인들이 고통 끝에 병원에 가는 뒤집힌 현실이 횡행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유년기부터 이어진 아동학대로 인한 트라우마로 끝내 자신의 부모를 살해한 이은석의 범행의 근본적 원인을 두고 당시 전문가들은 NPD(자기애성 성격장애)였던 아버지와 완벽주의자였던 어머니의 잘못된 훈육을 지적했다. 사진 = 연합뉴스

유년기부터 이어진 아동학대로 인한 트라우마로 끝내 자신의 부모를 살해한 이은석의 범행의 근본적 원인을 두고 당시 전문가들은 NPD(자기애성 성격장애)였던 아버지와 완벽주의자였던 어머니의 잘못된 훈육을 지적했다. 사진 = 연합뉴스


문득 19년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경기도 과천 토막살인 사건이 떠올랐다. 당시 피해자는 부부였고 범인은 부부의 아들로 밝혀져 충격을 안겼다. 군 제대 후 복학을 준비했던 명문대 휴학생으로 알려진 사내는 왜 부모를 죽인 끔찍한 패륜아가 된 것일까? 경찰 조사에서 밝혀진 남성의 아버지는 해군 중령을 지낸 군인으로 자신은 가족에게 무심해도 가족이 자신에게 다정하지 않음을 용납하지 못하는 전형적인 NPD형 인물이었다. 여기에 어머니는 자존심이 강한 완벽주의자에 사이비 종교에 심취해 있던 것으로 드러났다. 부부는 자신의 분노를 자녀에 대한 엄격한 훈육으로 해소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끝내 존속살해로 이어진 아동학대


전문가들은 부모가 자녀의 유년기부터 자행해온 아동학대가 그 원인이며, 이후 학교와 군대, 사회생활에서 그가 겪은 차별과 폭력은 그의 내면에 자기비하와 좌절감, 그리고 분노를 싹트게 했고 급기야는 존속 살해로 이어진 것이라 분석했다. 실제로 부모를 살해한 청소년 중 90%가 아동학대 경험이 있는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케임브리지대와 하버드대 정신과 교수를 지낸 크레이그 말킨 박사는 자신의 책 ‘나르시시즘 다시 생각하기’에서 변화하지 않는 중증의 나르시시스트의 유형을 세 가지로 집약했다. 첫째는 정신적·신체적 학대자들, 둘째는 정신질환적 기질이거나 정신질환자들, 셋째는 부정하는 사람들로, 이 증상이 최고조로 악화된 NPD의 경우엔 다른 사람의 감정을 전혀 느끼지 못한 상태에 이른다고 말킨 박사는 설명한다. 이들은 상대방의 말과 행동에 상처받았을 때 그 감정을 내색하거나 털어놓는 대신 분노로 맹렬히 쏟아내는데, 상대의 결점을 낱낱이 지적해내는 한편 소리치는 자신을 두고도 “나는 소리지르는 게 아니야”라며 감정을 회피하는 극단적 상태로 치닫게 된다.

죽고 싶은데 살고 싶다

죽고 싶은데 살고 싶다


타인의 느낌과 감정에 무감한 ‘감정공포’ 상태의 NPD가 자신의 잘못이 미처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고 무덤덤하게 생활하는 사이 그 부모와 형제, 아내와 자식들은 고통 속에 서서히 병들어 영혼의 죽음에 이르게 된다. ‘죽고 싶은데 살고 싶다’는 어쩌면 병원에 가야 할 사람들이 그 이유도 모른 채 주변에 안긴 고통에 서서히 죽음을 마주해 급기야 병원을 찾은 무고한 이들의 생존을 위한 투쟁의 기록일지 모른다.


<죽고 싶은데 살고 싶다/김인종, 김영철 저/바른북스/1만5000원>




김희윤 기자 film4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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