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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웅의 행인일기 41] 몽생미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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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북부 노르망디 바닷가 마을. 옛날 이 마을 성당 오베르(St. Aubert) 주교의 꿈에 미카엘 천사가 나타나셨네요. ‘바닷가 바위섬 위에 예배당을 지어라!’ 주교는 두 번이나 같은 꿈을 꾸었지만 ‘험한 바위섬 위에 예배당을 어떻게 짓는담!’ 하면서 자신이 없었지요. 세 번째로 같은 꿈을 꾸게 되는데 이번엔 천사님도 방법을 달리 하십니다. 손가락을 이마에 짚자 온몸이 불에 타는 꿈을 꾸게 하지요. 믿거나 말거나, 지금도 보관되어 있는 주교의 두개골 유해엔 희미한 손가락 자국이 있다고 하네요. 아무튼 주교는 천사의 손가락 흔적을 하느님의 증거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708년, 바닷가 외딴 섬 암벽 위에 하느님의 역사가 시작되어 수세기에 걸쳐 증축되더니 오늘에 이르게 됩니다. 바다 위의 피라미드. 높이 80m의 험한 암벽 위에 세워진 수도원. 몽생미셸의 탄생 설화입니다.


몽생미셸(Mont Saint-Michel)은 ‘신성한 미카엘 천사의 산’이란 뜻이지요. 바위 위에 우뚝 솟아 마치 산처럼 보여서 그리 불렀을 겁니다. 이 바위산 위에 수도원이 들어서자 미카엘 천사가 나타나서 기적을 많이 보였다는 전설도 전합니다. 실제로 수도원 꼭대기엔 칼을 들고 서 있는 황금빛 미카엘 대천사 조각상이 있습니다. 멀리서 보면 아주 자그마한데 높이가 3미터나 된다는군요. 그는 영국 쪽을 바라보며 이곳 노르망디를 수호하려는 의지를 불태웁니다. 백년전쟁 때의 치열한 전투를 짐작할 만합니다.

사진만으로도 숨 막히는 아름다운 풍경. 연간 250만 명이 방문하는 프랑스 최고의 해변 명소. 파리에서 버스를 타면 네 시간이나 걸립니다. 광막한 해안 모래밭 위의 작고 외로운 산. 수도원이지만 견고한 성 같은 요새. 주변을 둘러봅니다. 바다는 넓고 대지는 찬란합니다. 하늘은 어쩌면 이리도 큰 지요. 대지와 바다와 하늘 사이, 홀로 아름답고 외로운 성. 보는 사람은 그래서 더 미칩니다.


만조 때면 외로운 산은 섬이 되지요. 몽생미셸 만(灣)에는 에메랄드빛 바다가 펼쳐집니다. 바다는 깊지 않습니다. 썰물 때는 12㎞ 바깥까지 물이 나갑니다. 밀물이 들면 바위산 코앞까지 잠기지요. 바닷물은 1분에 100m 속도로 달려옵니다. 예전 순례자들이 밀물에 휩쓸려 죽곤 했던 이유입니다. 바다 위의 치명적으로 아름다운 수도원. 그들은 만을 가로지르다 밀물에 휩쓸리며 기도합니다. ‘천사의 아름다운 집을 봅니다. 주여,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나이다!’


지금은 수도원까지 길이 있어서 위험하지 않지만, 일부러 만을 가로질러 오는 순례자들도 있습니다. 오후 햇살에 얼굴이 눈부시게 빛나는 노부부. 낡은 배낭을 멘 채 서로를 얼싸안습니다. 세상에! 파리에서부터 걸어왔다는군요. 파리에서 몽생미셸까지 걸어가기. 황혼부부의 버킷리스트였나 봅니다.

특별한 감회는 수도원 내부에서도 느낍니다. 궁핍. 베네딕트 수도사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종교의 그늘’이지요. 철저한 금욕생활 때문에 영양실조와 질병으로 죽는 수도사들도 많았습니다. 변변한 의료시설과 약도 없었답니다. 죽어서 빨리 천국에 가라는 메시지만 지금도 눈에 뜨일 뿐이지요. 종교와 신앙의 그늘! 그 서늘함에 제 뼈가 다 시립니다.


채광 좋은 어느 방에 가니 그런 느낌이 잠시 사라지네요. 성경을 필사하던 곳. 다섯 명이 똑같은 필체로 책을 만들어 귀족들에게 선물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귀족들이 수도원에 기부하고 그 돈으로 수도원 살림을 꾸려가는 겁니다. 한편으로 생각하니 서늘한 궁핍은 거룩한 가난이기도 합니다. 이런 청빈이 종교의 본질일 테지요. 여기는 수도원 유일의 벽난로가 있는 방. 추위에 손 곱지 말라는 특별한 배려가 눈물겹습니다. 신의 말씀을 옮겨 적는 인간의 손. 그 손 얼지 말라고 덥혀주는 불빛. 거룩한 가난의 손등을 스치는 신의 입김이 아닐까요? 추위만 겨우 면하게 하는 서러운 불빛. 삶을 견디는 힘줄 가운데 고결하고도 슬픈 힘줄입니다.


신성한 아름다움 뒤편의, 서러운 사람들 이야기는 또 있습니다. 수도원 바닥의 돌들에 새겨진 아라비아 숫자의 비밀! 이 돌들은 40㎞ 바깥 바다 군도(群島)에서 가져왔습니다. 하루 일한 양에 따라 급여를 주기 때문에 8자는 여덟 개를, 9자는 아홉 개를 만들어서 보냈다는 뜻이지요. 건축 실명제는 아니지만 손바닥 못박인 어느 노동자의 서러운 기록임은 확실합니다.


바다가 얕아서 큰 배는 들어올 수 없는 지형. 밀물 때 나룻배에 돌을 실어 보냈다고 합니다. 먼 바다에 나가 돌 다듬는 석공들. 고된 노동 현장이 여기 아라비아 숫자에 새겨져 있습니다. 당신은 나룻배. 나는 돌. 숫자 새겨진 바닥 돌 떠나보내는 석공의 심정이 저 돌 속에, 숫자 속에 심겼을 테지요. ‘이 돌이 모쪼록 제 가족의 일용할 양식이 되게 하소서!’ 바람과 바다가 먼 후대의 인류에게도 전해주리라 믿었을 것입니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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