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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임라이트]90년대 흥행보증 배우, 초심을 다시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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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우상' 구명회役 한석규

영화 '우상' 스틸 컷

영화 '우상'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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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관념 넘어선 깊이에 대한 고민, '우상' 야욕에 눈 먼 타락한 정치인 연기로 이어져

두 번의 변신 그리고 회복한 초심 "가끔 독한 약 먹어야 병든 몸도 나아"


배우 한석규는 1990년대에 흥행 보증수표였다. 주연하는 영화마다 대박을 터뜨렸다. '닥터봉(1995년)', '은행나무 침대(1996년)', '초록물고기(1997년)', '넘버3(1997년)', '접속(1997년)', '8월의 크리스마스(1998년)', '쉬리(1998년)'. 한석규는 "운이 좋았다"고 했다.

"초록물고기와 같은 작품은 시나리오가 매우 훌륭했다. 문장 하나하나가 치밀했다. 극장에 모인 관객에게 시나리오를 나눠주고 싶을 정도였다."


초록물고기에서 연기한 막동은 서민적이고 친근했다. 군대에서 막 제대해 아등바등할수록 절망 속에 빠져들었다. 그래서 살인을 저지르고 공중전화 부스에서 울먹이는 얼굴이 처연하게 다가왔다. 한국사회의 폭력성에 물들어버린 한 청년의 회한이 서린 표정이었다.


"큰 형 생각나? 빨간 다리? 빨간색 철교. 우리 아주 어렸을 때 빨간 대교 밑으로 물고기 잡으러 많이 다녔었잖아. 내가 언젠가 초록색 나는 물고기 잡는다고 그러다가 슬리퍼 잃어버려가지고, 큰 형이랑 형들이랑 하루 종일 놀지도 못하고, 슬리퍼 찾으러 다녔었잖아. 수남이 그 병신은 벌에 엉덩이 쏘여가지고 엉덩이 세 개 됐다고, 둘째 형이 놀리고 그랬었잖아. 큰 형, 그때 생각나? 그때 생각나?"

영화 '초록물고기' 스틸 컷

영화 '초록물고기'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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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규는 막동을 드라마 '서울의 달(1994년)'에서 그린 홍식의 연장선으로 느꼈을 거다. 재개발 열풍에 가린 소시민의 또 다른 얼굴로 해석될 여지가 충분했기 때문이다. 그는 시대의 분위기를 반영한 배역을 잘 연기해냈다. 여피(도시 주변을 생활 기반으로 삼고 전문직에 종사하면서 신자유주의를 지향하는 젊은이)의 이면을 섬세하게 묘사했고, '헬조선'을 예견한 소용돌이 속에서 혼란한 사회상을 채색했다. 한국 멜로영화에 새 이정표도 세웠다. 특유의 부드러운 표정과 음색, 느릿느릿한 리듬으로 차분하고 담백한 정서를 그려내며 일본에서나 볼 수 있었던 리얼리즘 멜로의 정수를 보여줬다.


"옛날에 군대에서 내 바로 밑에 졸병 애하고 같이 보초를 서고 있었거든. 둘이 그렇게 한참 보초를 서고 있는데, 어디서 갑자기 방귀 냄새가 나네. 그래서 내가 그 졸병 애한테 '야, 너 방귀 뀌었지?' 그러니까, 자기는 방귀 안 뀌었데. 그러면서 자기 방귀 안 뀌었는데 내가 뀌었다고, 자기한테 덮어씌운다고, 이놈이 나한테 막 뭐라고 하는 거야. 그래서 뭐 그렇게 한참 옥신각신하다가 그냥 날씨도 춥고 그래서 내무반으로 그냥 들어갔거든. 그런데 내무반에서 막 잘라고 하는데. (다림이 팔짱을 끼자 잠시 말을 멈춘다) 그러는데." "근데요." "근데, 근데 얘가 심각하게 그러는 거야. 자기 방귀 안 뀌었다고."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스틸 컷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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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정원을 연기한 한석규는 부드러운 남자의 표상이 되었다. 커피 한 잔을 들고 머금는 잔잔한 미소와 전화기를 잠시 꺼두는 자상한 눈길. 스크린에서는 정반대였다. 이미지가 굳어버릴까 싶었는지 양식적이고 계산된 연기에서 점점 벗어났다. '주홍글씨(2004년)'의 이기훈과 '그때 그 사람들(2004년)'의 주 과장, '음란서생(2006년)'의 윤서, '구타유발자들(2006년)'의 문재 등이다. 걸쭉한 욕설과 폭력, 냉소적인 미소는 광고에서 보여준 이미지를 지우고 야비하면서 차가운 기운을 드러냈다. 허리 디스크 때문에 고생하면서도 카메라 앞에서는 놀라울 만큼 에너지를 짜냈다. 그는 "그 무렵 건강이 갑자기 나빠지니까 '연기를 그만둬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배우를 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자꾸 묻게 됐다. 그런 생각에 자꾸 사로잡히니까 자신감이 떨어지고 지쳐갔다. 무언가에 홀리고 있는 기분이었다."


한석규는 50대가 돼서야 초심을 되찾을 수 있었다. 대중이야 속사정을 사정을 알 리 없다. 여전히 그를 잔잔한 미소와 눈길로 기억할 뿐이다. 한석규는 "동시대 관객이 저의 익숙한 모습을 떠올리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했다.


"그래도 조금씩 변하는 얼굴을 계속 지켜봤다면 제가 무슨 생각을 가지고 사는지 대략 알 수 있을 거다. 정치인이나 음악가의 발자취를 더듬으면서 그들의 생각을 읽어내듯이."


영회 '천문: 하늘에 묻는다(가제)' 스틸 컷

영회 '천문: 하늘에 묻는다(가제)'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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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규는 이제 고정관념에 변화를 더해 극의 깊이를 더하고자 한다. '우상'은 그 시발점이 될 수 있다. 차기 도지사 유력 후보인 도의원 구명회. 아들이 교통사고를 내고 피해자를 유기하자 단순 교통사고로 위장해 자수시킨다. 사고 현장에 목격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 뒤를 쫓는다. 야욕에 눈이 멀어 타락하는 정치인이지만, 대중은 박수를 보낸다. 현대인의 무력감을 가감 없이 전하는 대목이다. 한석규는 "시나리오를 덮으면서 정곡을 찔린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영화는 가짜를 통해서 진짜를 이야기하는 거다. 결국 배우는 가짜를 진짜처럼 보이게 하는 사람이다. 온몸을 다해 구명회를 그리고 싶었다. 사실 독 같은 영화다. 하지만 가끔은 쓴 약을 먹어야 병든 몸이 나을 수 있지 않을까."


영화 '우상'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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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데뷔 29년차.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창조적인 시기는 지났을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익숙한 이야기에서 새로운 것을 찾으려고 애쓴다. 각 시기마다 표현할 수 있는 연기가 다르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한석규는 우상이 정체된 한국영화계에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가 되길 희망한다. 그가 승승장구한 1990년 중후반처럼 말이다. 최고 자리에서 내려온 지 오래지만, 또 한 번 비상을 꿈꾼다.


"젊었을 때 '뉴 코리안 시네마'를 이야기한 적이 있다. 새로운 한국영화를 꿈꾸고 맹렬하게 연기했다. 자본, 투자, 제작자 모든 것이 급변하던 때였다. 1998년에 멀티플렉스도 생겼고. 제가 꿈꿨던 새로운 한국영화를 하기에 좋은 시기였고, 거기에 공감하는 영화인도 많았다. 최근 한국영화를 생각해보니 새로운 작품이 절실하게 필요한 시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우상은 그런 면에서 분명 새로운 영화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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