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가끔 쓰는 말 중에 "지방방송 꺼!"란 얄궂은 말이 있다. 누군가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말을 하려고 하는데 옆에서 누군가가 쓸데 없어보이는 말을 소근거려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것이다. 이럴 땐 꼭 한 마디 나온다. 어이, 지방방송 꺼!
그런데 이말 곰곰히 생각해보면, 듣는 지방방송 사람들은 억장이 무너질 말이다. 이것도 일종의 은유일 텐데, 그리고 은유란 건 눈에 띄기 쉬운 것,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을 가지고, 눈에 안띄는 것, 생각하기 어려운 상황을 집어내는 인간의 기술일진대, 우리나라에 언제부터 방송국이 이렇게 많아서 지방방송이 이렇듯 우스개에까지 쓰인단 말인가? 그리고 어쩌다 쓰인 그 말씀씀이가, 지방방송은 언제나 중앙방송 앞에서 볼륨을 줄이거나 아예 꺼버려야 하는 성가신 존재로 인식되게 되어있다. 지방방송 열받기 딱 알맞다. 일사불란과 큰 것 중심주의의 묵은 편견이 이 지방방송 꺼!에 인처럼 박혀있다.
어떻게 보면 중앙방송과 지방방송은, 커버해야 하는 지역의 차이만을 의미할 뿐인데도, 우린 왜 모든 것에 대해 중앙이어야만 안심하고, 중앙의 줄에 서있어야 좀더 그럴 듯 보이고 믿음이 가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지방화, 풀뿌리민주주의를 입으론 외치지만 아직도 마음 속에 뿌리내리기에는 멀었다는 뜻일까? 로컬이라고 말쑥한 영어로 표현해놓고 보면 그럴 듯 하지만, 그걸 촌놈이나 깐쮸리로 바꿔놓고 보면 거긴 왜 그리 지독한 비웃음이 끼어드는가?
지방방송 꺼!로 환유될 수 있는 우리의 획일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의식구조는 의외로 심각하다. 그런 걸 우린 정치판에서 물리도록 보아왔다. 어느 국회의원의 명언인 싸가지없는 년!발언도 따지고 보면, 여성이라는 약점아닌 약점으로 상대의 의견을 묵살해보려는, 지방방송 꺼!의 연장선이다. 수틀리는 이견, 나즈막한 소리, 사소한 불평불만, 소수의견에 대해서 가차없이 매도하는 태도는 광기이거나 폭력임에 틀림없을 텐데도 우린 너무 쉽게 용납해준다. 다 그런 거지머,하고 고개를 끄덕이고 만다. 누군가 자세하고 섬세한 사정에 관해 호소를 하려고들면, 말많으면 빨갱이야, 절이 맘에 안들면 중이 떠나라구!라는 더 엄청난 면박으로 입을 틀어막고 만다.
물론 지방방송 꺼!라는 말 자체가 아주 이해못할 말은 아니다. 토론의 효율성을 위해서 많은 사람이 경청할 필요가 있는데 일부의 다른 대화가 그것을 방해하고 있다면 그런 환기를 통해 원하는 분위기를 조성할 수도 있을 것이다. 딴 대화에 열중하고 있는 소수의 사람에게 중요한 대화가 진행되고 있음을 귀띔하는 정도의 말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방방송 꺼!라는 말에는 소수의 대화를 얕보는 태도가 느껴진다. 그리고 점잖은 권유를 넘어서서 중요한 말씀 하시는데 사소한 잡담은 집어치우라는 식의,독선과 권위주의의 냄새가 풀풀 솟아난다. 문제는 여기에 있는 게 아닐까? 대화의 상대적 중요성에 관해서는 각자가 판단해야할 문제다. 토론의 효율 만을 겨냥했다면 보다 정중하고 따뜻한 방식으로 주류적인 대화에 동참토록 해야할 것이다.
우린 왜 이 잡음을 견디지 못할까? 이 잡음이 자신의 말과 존재를 무시한다고 생각할까? 각자의 작은 대화들이 공존하는 것에 대해 못마땅해하며 큰 목소리 하나에 모두가 귀기울이는 형태의 대화방식이 더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할까? 그러고 보니 지방방송은 대체로 소리의 규모는 작지만 두 사람 이상이 나누는 대화들이며, 중앙방송은 어떤 주목받아야할 사람이 썰을 푸는 방식의 연설이다. 이쯤에서 독재자라는 말이 생각난다. 영어로 dictator이란 표현 말이다. 독재자는 말하는 사람, 특히 혼자서 말하는 사람이란 뜻 아닌가. 남들 입은 막아놓고 내 말 들어봣! 이라고 훈시를 늘어놓는 사람. 독재자는 바로 이 지방방송을 틀어막는 중앙의 목소리가 아니겠는가. 이 독재 스타일의 일방적 의사소통 분위기에 익숙해진 것은 바로 학교교육 때문이란 생각이 든다. 수업 중 우린 선생님으로부터 "떠들지맛!"하는 근엄한 목소리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고, 그러다가 떠든 죄로 재수없이 걸린 학우들이 손들고 벌 서거나, 심할 때는 몽둥이로 혼쭐나는 장면을 수없이 목격해왔다. 수업과 관련된, 그리고 선생님으로부터 공인된 얘기가 아닌 것은 모두 잡담이며 사담이며 떠들기이다. 그런 교육이 수많은 학생들을 수업시간에 입닫게 만드는 데 효율적으로 기능해왔는지 몰라도, 적어도 그 아이들의 머릿 속에 지방방송 떠드는 놈은 벌받아야 하는 놈이란 등식까지를 함께 심어줬다. 이 세뇌가 떠드는 것, 소수의견, 소란, 개성적 행동 등에 대한 유난한 알레르기로 발전해온 것은 아닐까?
한 외국인이 우리나라에 와서 대학생의 시위장면을 보고는 매우 감동하더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어떻게 개인주의화한 현대사회가 이렇게 액티브하고 건강할 수 있느냐는 놀람이었다. 액티브? 건강? 이게 무슨 소리인가? 우린 시위라는 말 속에, 언제나 나쁜 놈들, 시끄럽기만 한 놈들, 위험한 놈들, 비생산적인 놈들, 경찰서 잡아가 족쳐서 내보내야 정신차릴 놈들,이란 의미를 달고 살아왔는데, 이게 무슨 액티브표 신발에 건강 무좀생길 소리인가? 자기나라 아니라고 대충 막말하는 건가?
하지만 그 외국인의 경탄은 그런 무책임한 표현이나 그저 튀는 말 한번 해보겠다는 표정이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난 생각의 발로처럼 보였단다. 격렬한 시위가 사회의 건강성을 보여준다는 생각은 그리 일반적인 생각이 아닐지 모르지만, 꽤 신선한 통찰이 그 속에 숨어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시위는 곧 사회의 혼란이라는 관점은 전시대의 일부 삐딱한 통치자들이 나라를 좀더 쉽게 말아먹고 싶다는 욕망에서 국민들에게 효과적으로 주입시켜온 어떤 세뇌의 결과일지 모른다. 시위란 생동감있는 의견의 표현이며 그것은 사회의 합의를 이끌어내는 썩 괜찮은 절차라는 점에 우리 국민들이 동의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 모습이 건조하고 무시무시한 이 나라의 획일주의적 이데올로기를 꿰어온 강박의 한 풍경인지 모른다. 어쨌든 운동권이 아닌 외국인이 늘어놓는 시위예찬론은 그 사회에서 구가할 수 있는 자유의 크기를 말해주는 것 같아 괜히 좀 부러워진다.
교과서를 새삼 꺼내지 않더라도 소란함,이견,언쟁은 인간의 다양성과 다채로운 인격의 반영이며, 그것은 민주주의라는 큰 틀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섬세하고 치열한 과정들이다. 이런 절차가 생략된 자유민주주의는 없다. 지방방송의 비애는 바로 민주주의를 압살해온 권력의, 혹은 주류의, 혹은 다수의 횡포가 만들어낸 부당한 강요이다. 저 소근거리는 소리를 억압할 자유는 누구에게도 없다. 어쩌면 저 소근거리는 소리가 더욱 중요한 토론일 수도 있으며, 결과적으로 더욱 가치있는 견해일 수도 있다. 가치있는 견해가 아니라고 일반적으로 판단된다 하더라도 침묵을 강제할 권리가 누군가에게 있어서는 안된다.
그건 다만 우스개일 뿐이고, 잡담을 좀 삼가라는 권유에 불과하다고? 그래. 그럴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은유를 제발 좀 바꿔라. 지방방송과 주위의 토론을 함께 매도하지 말아라. 지방방송도 기분나쁘고 속삭인 사람도 열받는다. 우스개라고 하지만 아무도 우스운 사람이 없지 않은가? 그런데 지방방송도 터치하지 말라고 주장하는 건 좋지만 시끄러워서 얘기하기 곤란한 점은 어떻게 해결하느냐고? 시끄러우면 컨텐츠로 좌중의 관심을 끌어내면 된다. 내용이 좋으면 그렇게 음산한 목소리로 좌중을 뭉개지 않아도 저절로 귀를 열지 않을까? 그렇게 내용이 좋은 게 아니고 꼭이 모든 사람이 다 듣지 않아도 상관없는 것이라면 시끄러운 분위기가 차라리 좋다. 시위를 생동감있다고 표현하던 외국사람도 있지 않던가? 소란한 토론장소야 말로 얼마나 싱싱한가? 저 지방방송들의 난무는 토론의 혼란이 아니라 보다 섬세하고 다양한 의견교환이 진행되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보면 안될까?
그래도 꼭 할말이 있다구? 내용이야 별 거 아니지만 그래도 폼잡아야 할 때가 있지 않느냐구? 그래. 그렇다면 해묵은 버릇이니 하는 수 없지. 다만 이렇게만 좀 얘기해 주면 좋겠어. 어이, 거기 엠비쉬,케이비에수,에수비에수 여러분 중앙방송들 좀 꺼주십시요. 지방방송에서 갓 올라온 뉴스 하나 전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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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편집에디터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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