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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낱말의 습격]남대문이 열렸다?(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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낱말의 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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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우스개로 어이, 남대문이 열렸네,라고 말하는 건 바지 앞섶이 풀어진 상태를 대체로 쑥스럽지 않게 알려주려는 배려이다. 서울 도성으로 들어오는 관문이었던 이 대문을 거기 부위를 가리고 여는데 쓰이는 옷트임새에다 은유하는 건 무엇보다 과장스럽고 기발한 맛에 널리 유포된 농담이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 남대문이 남자의 대문을 축약한 말일 수도 있겠다 싶다. 그러면 절묘한 뜻겹침이 아닌가? 대문을 열고닫음이란 아주 신중해야 한다는 이 나라의 내력있는 모럴까지도 슬쩍 비치고 있으니 말의 뒷맛 또한 괜찮다.

남대문이 열렸는지도 모르고 출근하는 한 사내의 초상에는 쉽게 부주의로 몰아버릴 수 없는 삶의 숨가쁜 그림이 그려진다. 이 사내가 그 중요한 아래를 살필 겨를도 없도록 무엇인가가 바쁘게 했을 것이다. 그게 열렸네,라는 환기와 함께, 화들짝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허리를 엉거춤 휘어접은 채 지퍼를 올리거나 단추를 꿰는 그 모양새 또한 몇번은 어디선가 본 듯한 풍경이다. 누구든 언젠가 그런 당황스런 상황에 봉착할 수 있는 일이니, 그걸 마냥 남의 일로만 비웃어선 안된다. 내밀한 인생의 상징인 그 꽃무늬 빤스의 견본이 그 아래틈으로 빼족 얼굴을 내민 상황은, 우리가 감추어야 할 속과 드러내야할 겉을 혼란스럽게 한 죄로 일정한 책망이 불가피하다. 그것은 그 행위의 위험함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환기시키는 욕망이 대도시 한복판의 햇빛을 정면으로 즐기지 못하도록 일벌백계하는 차원이리라.
장구한 역사에 빛나는 남대문국민학교의 교가는 윤석중선생님이 지었다. "학교문을 나서는 저 남대문은/ 장안을 지켜주는 서울의 대문/ 이담에 우리들은 저 문을 나가/ 나라에 흩어져서 일을 한다네/ 서울에도 한복판 우리 학교/ 남남남대문은 우리의 자랑." 서울에도 한복판이란 소박한 자랑이 웃음을 길어올리지만, 그래도 도성(都城)의 안에 있는 학교답게 이제 저 문을 나가 전국 방방곡곡의 일꾼이 되겠다는 기개는 아름답다. 많은 이들의 욕망과는 역주행이 아닌가? 우린 어린 시절부터 전국 방방곡곡에 살면서 저 좁은 도성 안으로 기필코 뚫고 들어가 거드름 피울 한 벼슬 하고 살겠다는 속된 꿈에서 벗어나지 못했는데 말이다. 과연 스케일이 좀 다르다. 그런데 내가 그 교가에서 주목하고 싶은 건, 그 국민학교가 어떤 다른 의지처보다도 더 맹렬히 남대문이라는 명칭과 그 상징에 기대고 있다는 점이다. 왜 그랬을까? 이 대문이 주는 깊은 영감과 감동은, 새싹들의 영혼을 일깨우는데 더 다른 것을 부를 필요도 없이 충분한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아까 장구한 역사에 빛난다고 했지만, 실은 이 학교는 1979년에 사라져버린 추억의 학교다. 해방되던 해에 개교해서 육이오때는 부산으로 피난가 범일동에 분교를 세우기도 했던 학교다. 이 학교 학생 중에는 그때 부산에서 남대문국민학교를 다니다가 전쟁이 끝난 뒤 학교를 따라 서울로 올라왔던 사람도 있었다. 폐교된 만큼 그 학교를 나온 동창생들의 마음의 추억들은 더욱 간절해졌는지 그 시절을 기억하려는 동창모임이 활발한 모양이다. 비만 오면 무릎까지 흙탕물이 들어찼던 남대문 지하도를, 키큰 어떤 오빠의 등에 업혀 건넜던 기억을 사십년 세월 동안 먼지 한올 앉히지 않고 가슴에 지녀온 여인도 있다. 그 시절도 있었던 남대문극장 앞에 미제초콜렛과 과자를 사먹으러 달려갔던 농땡이들도 있었다. 남산 기슭에는 가재를 잡아 구워먹을 정도로 맑은 물이 흘렀고, 지금의 대우빌딩 뒤에만 해도 사마귀, 물방개, 장구아비를 잡으러 다니는 숲이 있었다. 내가 요즘 가끔 술먹고 배회하는 순화동 골목을 아이들은 몰려다니며 찜뽕, 다망구, 사방치기, 팔방치기, 팽이찍기를 하였단다. 러시아 딸기코 화장품아저씨, 절뚝이 갈치장수 아저씨. 검붉은 얼굴들 쉰 목청이 그들 기억을 아물거리게 한다. 남대문 주변에는 이 아이들의 그리운 소란이 아우라처럼 깔려있다. 이들은 교가의 주문대로 모두 도성을 떠나 이제 저마다 늙어가는 중년들이 되어 남대문을 기웃거린다.

남대문은 국보 제1호다. 나라에서 가장 아끼는 보물이라는 뜻이니 어린 시절 이 말만 듣고서도 금방 이 대문에 대한 존경심이 생겼다. 도대체 어떻게 생긴 문이기에 이 나라 역사에서 가장 자랑삼을 만한 것이란 말인가? 와서 보니 큼직하고 잘생긴 솟을대문이 예삿건물 통채보다 몇배는 크게 솟아있다. 아직도 그 안을 나는 들어가보지 못했다. 어떻게 들어가는지 알지 못한다. 그래도 남대문 구경은 빠짐없이 했다고 우기는 편이다. 남대문은 멀찍이서 봐야 진짜다. 설야, 커다란 백지로 변한 도로 위에 눈맞는 남대문은 더없이 아름답다. 그걸 구경하기 어려우면 저녁 무렵 환하게 불빛받은 남대문을 상공회의소 앞 벤치에 앉아 느긋이 감상하는 것도 괜찮다. 빛좋은 화강암제 다듬돌로 쌓은 축대 위에 2층의 문루가 장중하게 안겨있는 모습도 좋고 축대 복판에 무지개문도 견실 졸박하면서도 화려함을 숨기지 않는 기미가 좋다.
유럽냄새가 나는 서울역의 둥근지붕 밖으로 열차가 뱉어낸 손님들이 우르르 내려오면 남대문은 고개를 삐죽이 내밀고 서서는, 누가 왔나 살핀다. 그리고는 냅다 고개를 돌려 저쪽 광화문 쪽으로 외친다. 어르신, 손님 오셨어요! 그렇게 보고 말하기 딱 알맞은 거리에 서울역, 남대문, 광화문은 서 있다. 대문이라면 정남향이 알맞지만 그러면 저 꽉 막힌 남산을 들여다봐야 하기에, 남대문은 몸을 서쪽으로 약간 틀었다. 문이란 건 트인 공간을 바라봐야 제격이다.

남대문의 진짜 이름은 숭례문이다. 동대문이 흥인문이고 서대문이 돈의문이고 늘 닫혀있는 북대문의 이름은 숙정문이다. 인이니 의니 예니 하는 건 5상인 인의예지신에서 딴 것이다. 예를 높이는 게 숭례이고, 인을 흥하게 하는 게 흥인이고 의를 두텁게 하는 것이 돈의다. 숙정이란 정치적인 용어로 숙청이라 할 때 그 숙정인데, 아마도 엄숙미를 강조하기 위해 붙인 듯 하다. 5상은 방향과 관련이 있는데 남쪽은 예와 통한다. 숭례문은 조선 태조 7년인 1398년에 지어졌다. 아마도 나라를 정비하면서 가장 먼저 해야했던 일이 도성의 구축이었으니 만큼 남대문은 그 왕조의 위엄을 상징하기 위해 아주 공들여서 지었을 것이다. 숭례문이 자랑하는 것 중에는 현판이 있는데 특이하게 세로글씨로 씌어진 이 현판은 세종의 형인 양녕대군이 썼다. 술주정뱅이인 것처럼 가장해서 똑똑한 아우가 왕위를 계승하도록 배려한 그 지혜로운 형님 말이다. 내가 존경하는 추사 김정희도 과천에서 서울로 올라오면 저 남대문 앞에 우뚝 서서 숭,례,문 세 글자를 바라보며 그 문기(文氣)와 서향(書香)에 몸을 떨곤했다 한다. 이 현판은 임진왜란 때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는데 광해군 때 청파동 배다리 도랑 가운데서 밤에 이상한 빛이 새나오는 것을 보고 그곳을 파보니 거기에 이것이 묻혀 있었단다.

남대문의 아름다움을 이해하기 위해선 그 주위의 옛 지형을 살피는 것도 한 방법이다.지금이야 도로 한 복판에 한치 옴짝할 수 없는 죄수처럼 위리안치시켜놨지만 실은 남대문 주위는 숱한 사람들의 발길이 오가고 들락이던 자리다. 그 발때묻은 풍경을 떠올리지 않는다면 그저 현대문명의 농성군중같은 빌딩들이 에워싸 이 늙고 작은 건물을 삼키려하고 있는 비극의 현장을 보고갈 뿐이다. 기실 저 사각의 메마른 건물들이 당초엔 시선을 서먹하게 하는 괴수(怪獸)였음에 분명하나 그것들이 떼를 지어 낯익은 것을 압박하니 이젠 사태가 완전히 역전되어 남대문이 시대착오의 옹색한 구석이 되어가는 게 아닌가. 대문은 대문으로서의 쓰임새를 잃어버렸다. 대문 옆에 대로가 뚫려 서울에 들어오는 네바퀴 가마들이 모두 남대문을 비켜다니는 셈이 되었다. 이 또한 이 시대 남대문의 고독을 말해주는 웅변이다.

일제시대 이전만 해도, 현재의 서울역에서 태평로로 가서 시청을 지나치면서 광화문 네거리로 내닫는 큰길은 없었다. 조선시대 광화문이 제기능을 할 무렵에는 오늘날 남대문시장에서 신세계백화점 앞에서 왼쪽으로 한국은행을 끼고돌아 2호선 을지로 입구역과 1호선 종각역으로 이어지는 길이 제대로 된 길이었다. 남대문을 들어서면 이 남대문로가 굽이굽이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이 길 주위엔 아름다운 실개천이 흘렀다. 상동교회 못미친 곳에는 돌우물골을 건너는 수교(水橋)라는 자그마한 다리가 있었고, 그 뒤에 소광교와 광교가 놓여있어서 개천의 이쪽과 저쪽을 오가면서 사람들은 종각 쪽에 이르렀다. 물론 이 개울은 복개되고 다리들은 광교라는 이름 하나 만을 남기고 모두 사라졌다.

서울 도성의 아름다움은 이 실개천에서 피어올랐을 물안개와 이쁜 다리들, 그리고 그 갯가에 지천으로 피었을 꽃들과 푸른 숲병풍이 만들어냈을 것이다. 남대문은 그런 속내를 싸고안은 대문이었다. 지형상으로 보면 이 건물은 남산(목멱산)에서 키를 낮춰 내려앉다 잠깐 쉬는 넙적한 구릉에 자리잡고 있다. 지표높이 36.6미터나 되는 제법 높은 구릉인데 청계천이 서울시의 중심부를 흐르다가 용산으로 직류하여 한강으로 흐르지 못하고 동남으로 우회하는 까닭도 이 구릉이 있기 때문이다. 남대문 구릉은 용산, 서대문과 종로, 을지로를 가르는 분수령이 된다. 종각까지 흐르던 그 개울은 아마도 목멱이 뿜어내던 물줄기였을까?

강남에 사는 사람이 시내 갔다 오겠다고 말하는 건, 저 남대문 안쪽의 도성 지역인 광화문과 종로, 명동 일대를 흔히 가리킨다. 즉 한강을 넘어야 일단 서울시내로 진입한 맛이 나고, 특히 서울역을 지나 남대문을, 겉돌 망정, 지나쳐야 제대로 서울로 입성한 기분이 되는 것은 그래도 옛날의 무의식이 남은 탓일까?

이제 남대문은 서울 진입의 상징이란 의미를 자랑하기 보다는 남대문 시장의 번영에 홍보하는 편이 훨씬 더 쉬운 일이 되어간다. 물론 이 재래시장 또한 쇼핑건물의 첨단화 대형화에 밀려 서서히 활기를 잃어가고 있고 급작스럽게 밀어닥친 인터넷 쇼핑까지 엎친데 덮쳐 신음소리를 더욱 키우고 있는 중이다.(한편에서는 관광특구 지정, 패션몰 변신 몸부림 등으로 살아남기를 시도하고 있는 중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직은 남대문 시장의 성가는 쟁쟁한 편이다. 골라골라,로 대변되는 남대문패션은 비록 중상류사회의 외면은 받았을 지언정 이 나라 대중의 겉과 속을 가리고 보온하는, 의류 홍익인간의 국보1호가 되었다. 하필 바지섶 열린 것이 남대문이 된 것도, 이 남대문패션의 이미지와 결합된 것이 아닐까 하는 짐작도 선다.

남대문시장은 근 6백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재래시장이다. 선조 때 도성에 지방관리의 출입이 잦아지면서 자연스레 저자거리가 형성됐다고 한다. 영조 때는 이곳을 칠패장이라고 호칭하였다. 이 이름은 거리 등에 남아있다. 내게 이 시장은 아이들의 장난감이나 학용품을 사주는 쇼핑1번지이기도 하지만, 점심 무렵 칼치조림을 맛깔스럽게 내는 시장골목의 넝쿨식당과 걸쭉한 사투리의 여인이 회를 싸게 파는 막내횟집, 한뼘 공간에다 의자 몇을 놓고 아주 걸쭉한 십전대보탕을 파는 찻집이 있는 장소로 떠올려진다.

또 <뽕3>와 <용의 국물2>를 동시상영하는 옛 남대문극장의 기억 또한 사람을 일없이 서성거리게 한다. 북적이는 거리를 걸어 한껏 사람의 소음과 밀고당기는 생기를 느낀 뒤 이윽고 시장통을 벗어나면 멀찍이서 나를 바라보며 고풍스런 웃음을 지어주는 남대문은 뻐근한 산책길의 뒷마무리처럼 나를 상쾌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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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편집에디터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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