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朴의 가시와 MB의 전봇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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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글)에 대한 오해, '오독'(誤讀)은 때론 쌍방과실이다. '손가락'이 향한 '달'이냐,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이냐는 식의 '해석의 불일치'랄까. 대선 1주일 전 지면을 채운 '중기부 승격, 대중기 상생의 숙제' 칼럼(2012년 12월11일자)이 바로 그짝이다. 기업 성장의 한계를 꼬집었더니 중기청의 '부' 승격에 딴지를 건다는 타박이 돌아왔다(물론 일부 독자지만). 억울하지만 어쩌겠는가. 연장을 탓하는 목수가 될 수는 없지 않는가.


그새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는 당선인으로 신분이 변했고, 중소기업 지원책은 봇물을 이루고 있다. 중기청의 오랜 숙원인 '부' 승격은 여전히 안갯속이지만 분위기는 거침없다. 신문이고, 방송이고 연일 중기 뉴스가 '메인'을 독차지한다. 그야말로 '중기 전성시대'다.

박 당선인의 '중기 챙기기'는 파격적이다. 대통령 당선인으론 처음 대기업 총수들에 앞서 중기인들을 만났다. 중소기업인 신년 인사회에서는 "경제 구조를 중소기업 중심으로 전환하겠다"며 '중기 대통령'을 자임했다. "거창한 구호보다 손톱 밑의 가시를 빼주겠다"는 발언에는 중기의 오랜 애환이 씻겨내렸다.


꿈같은 허니문이다. 그런데 어디서 본 듯하다. 5년 전 이명박 대통령의 당선인 시절이다. 주인공만 다르다. 박근혜 대신 이명박, 중기 대신 대기업, 가시 대신 전봇대다. 망각이 때론 축복이라지만, 당시 기억을 애써 더듬어본다.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표방한 이명박 대통령은 당선 9일만에 재계 총수들을 만났다. 이 대통령이 당선자 신분으로 회동을 먼저 요청해 이뤄졌다. 두문불출하던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전경련과 담을 쌓았던 구본무 LG전자 회장 등 총수들이 총출동했다.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은 '11조 투자'라는 깜짝 선물로 화답했다. 청와대와 재계간 핫라인 설치도 약속했다. 분위기는 절정에 달했다.


허니문은 그러나 길지 않았다. 대기업을 압박하는 동반 성장, 재계를 겨냥한 대대적인 세무조사, 그룹 경영권을 옥죄는 연기금 의결권 강화 등 180도 달라진 정책에 재계는 당혹했다. G20 개최와 월드컵ㆍ동계올림픽 유치전 등 국가대사를 재계에 떠넘긴다는 볼멘소리도 터져나왔다. 이 대통령이 입버릇처럼 내뱉는 "내가 해봐서 아는데"는 서슬 퍼런 주술이었다. 재계는 "CEO 출신 대통령이어서 기업의 약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며 손사래를 쳤다.


청와대는 되레 책임을 재계로 돌렸다. 수많은 전봇대(기업 규제)를 뽑아줬는데도 일자리 창출과 투자에 미온적이었다며 서운함을 감추지 않았다. 파경의 배경을 놓고 티격태격했지만 결국은 상대를 잘못 읽은 '오독'이었다. '내 편'이라는 안일함과 지나친 기대감이 관계를 망친 것이다.


그렇게 비즈니스 프렌들리는 '망각의 강'을 건넜고 빈자리는 이제 중기 프렌들리가 차지했다. 예상 못한 일도 아니다. '새마을운동'과 '한강의 기적'으로 대변되는 산업화 과정을 가까이서 지켜본 당선인이다. 중기는 박 당선인의 정치적 근간이며, 부친에 대한 향수의 근원이다. 그래서 중기 챙기기는 숙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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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5년 전 파경이 그랬듯 박 당선인의 중기 챙기기도 절대불변의 낙인은 아니다. 중기가 중견, 대기업으로 성장하는 일은 지난하고 힘겨운 여정이다. 글로벌 경제는 언제 다시 응급실로 향할지 모른다. 중기 편애는 균형이 필요한 경제 시스템에 독이 될 수도 있다.


파경의 변수는 이처럼 숱하다. '오독'으로 인한 지나친 기대는 결국 실망을 낳는다. 적당한 거리와 긴장 관계는 허니문 기간을 연장시킨다. 그래서다. 중기 샴페인은 5년 뒤 터트려도 늦지 않다.


이정일 기자 jay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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