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100년-미래경영 3.0 창업주DNA서 찾는다 코오롱그룹 이원만 회장② <끝>
키 163cm·필기·면접 전국서 여직공 지원 쇄도
120명 모집에 9000명 지원 ‘나이롱女大’ 애칭
$pos="C";$title="";$txt="▲ 한국나이롱 공장에서 근무중인 여직공들. 한국나이롱의 여직원 모집은 당시 큰 화제를 낳았다.";$size="479,322,0";$no="2010050623412251960_1.jpg";@include $libDir . "/image_check.php";?>
[아시아경제 최일권 기자] 1958년 한국나이롱은 국내 첫 나일론 생산이라는 것 뿐 아니라 직원 채용에서도 화제를 모았다.
'나이 18세 이상 미혼 여성, 키 163cm, 필기, 면접'으로 이어지는 당시 한국나이롱의 여직공 채용전형은 요즘 대졸 신입사원 공채와 맞먹을 정도로 엄정했다. 학력제한은 중졸 정도였지만 필기시험에 가정환경까지 본다고 하자 대구지역 명문여고 출신들이 대거 몰렸다. 초기 120명 모집에 9000명 이상이 지원하는 등 한국나일론은 당시 대구지역 최고 인기직장 가운데 하나였다.
당시 실업자가 넘쳐나고 나일론이라는 합성섬유가 갖는 매력 때문인지 주위의 관심이 매우 높았다. 이 때문에 대구 뿐 아니라 서울, 호남 등지에서도 입사를 희망할 정도였다.
한국나이롱에 명문여고 출신 인재들이 몰린 것은 이 같은 이유 뿐 아니라 여성으로서 월급을 많이 받을 수 있는 일자리가 흔치 않았다는 점도 작용했다. 당시 선발된 직공들은 2개월 교육기간이 끝난 후 월 3만환의 봉급을 받았다. 주위에서는 한국나이롱 취업이 행운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또 '며느리를 보려면 나일론 회사에 가라'는 말도 생겨났다. 한국나이롱 공장이 있던 대구 신천동 일대는 '나이롱 여자대학'으로 불렸다.
그 이전까지 여공들은 '적은 월급에 갖은 고생을 하는 슬픈 이야기의 대명사'였으나 한국나이롱이 그 관념을 바꾼 것이다. 이동찬 명예회장도 "실제로 그들을 부리면서 함부로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고 회상했다.
당시에는 여공들을 위한 기숙사가 마련돼 있었는데, 이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식당, 세면장 같은 시설에도 완벽을 기했고, 당시로선 드물게 3교대 근무를 실시했다. '1일 8시간' 근무 제도를 적용한 것이다. 이 때문인지 한국나이롱 공장이 있던 대구 신천동 일대는 '나이롱 여자대학'으로 불렸다.
당시 대구일보는 한국나이롱 여공들에 대해 "과거와 달리 슬픈 얘기는 커녕 생존경쟁에 있어서의 첫 출발점으로서 '부러운 자리'로 변했다"면서 "대학생이나 고교졸업이다 할 것 없이 여공모집에도 혈안이 돼 응모한다"고 평가했다.
이 명예회장은 이 같은 근로조건이 양질의 제품을 생산하는데 크게 일조했다고 믿었다. 홍콩, 이란, 아프리카, 미국 등지에서 한국나이롱 스트레치 나일론을 다량 수입하기를 희망했으며, 특히 동남아에서 제품 명성이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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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나일론 원사 제조를 시작하면서 코오롱은 스트레치 원사 사업 비중을 서서히 줄이기 시작했다. 1969년 3월30일 한국나이롱은 스트레치 원사 공장 가동을 완전 중단했다. 한국나이롱 설립과 함께 이 공장에서 일해온 200여 명의 여공들은 모두 계열사로 흡수됐다. 이들은 우리나라 나일론 시대를 최초로 연 '의류 혁명'의 동반자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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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일권 기자 igch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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