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명이 밝아오는 시간이다. 어둠이 화선지위에 번진 몇 점의 먹물처럼 숲과 나무 그늘에만 남아 있다. 마당가 고로쇠나무 밑에도 짙은 음영이 드리워져 있다. 새벽녘 그 먹물속에서 깜빡이는 반딧불이 몇 마리가 보였다. 아직 잠들러 가지 않았단 말인가. 곧 새들의 습격이 시작될 터인데... 고로쇠 나무 밑에 깜빡이는 반딧불이는 햇빛을 피해 커튼속에 숨은 드라큐라 같다.
"사랑은 그렇게 하는 것인가 ? 목숨을 걸면서 ??"
반딧불이가 빛을 내며 어둠속을 날아다는 것은 짝을 찾기 위함이다. 여명에 사랑을 구한다는 것은 그에게 단 하나의 목숨을 거는 것이다. 곧 잠깬 새들이 먹이를 먹으러 몰려들 시간이다.시간이 없기만 한 것이 아니라 수많은 위험과 상실 앞에 놓여 있다. 그것들은 도무지 싸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나는 태양에 맞서는 반딧불이의 불꽃을 보며 어둠을 감싸주고 싶었다.반딧불이가 태양을 이길리 만무할진데...허무해 보이질 않는다. 몸속의 마지막 진기로 불꽃 내며 사랑을 구하는 반딧불이들. 나는 좀더 지켜보았다. 태양이라는 거대한 조건과도 맞서고, 새들이라는 적을 어떻게 이겨내 지를 ... 빈딧불이가 가진 빛과 날개는 태양이나 새들에 견줄만한게 못 된다.그러니 사랑을 찾기에 부족하다. 또한 새의 공격을 피할만한 날개도 없다.
새벽녘, 모든 소리가 한꺼번에 바뀌는 순간이 있다. 벌레소리에서 새소리로 바뀌는그 경계엔 잠시 깊은 침묵과 고요가 흐른다. 여명이 밀려오면 벌레들은 노래를 멈추고, 은신처로 몸을 숨긴다. 숲의 지배자들이 벌레들에게서 새들에게 바꿨다. 이제 짝을 구한 벌레들은 아늑하고 따뜻한 사랑을 나누게 되리라.
새들이 소란스럽다. 배고픈 새들은 벌레를 찾아 나선다. 지금 그 위협이 반딧불이에게 직면해 있다. 곧 고로쇠나무밑의 어둠도 사라질게다. 한여름, 밤의 길이는 한껏 짧아졌다. 벌레들이 사랑을 나눌 시간도 각박해졌다. 그 각박한 새벽녁의 반딧불이는 숭고해 보인다. "사랑을 하려거든 목숨 바쳐라..."라는 노랫말이 생각난다.
사실 나이가 들수록 내게도 이 세상의 모든 사랑은 다 절실해져간다. 진한 불륜일수록 지저분한 추문일수록 가슴이 뛴다.그리고 "그들은 정말 사랑했을까 ?"더욱 궁금해진다. 자꾸만 사랑에 대한 면죄부가 커진다. 하늘을 나는 새들보다 어둠에 깃드는 벌레들이 더 애틋해지는 건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무모해 보일수록 더 감동적이니...
"저게 반딧불이예요.지금껏 첨 봐요."
......
한달전 쯤 올해 첫 반딧불이를 만났다. 옛 직장 동료의 부친상가에서 만난 후배를 끌고 늦은 밤 돌아와서였다. 아내와 후배 나 셋이서 마당에 앉아 술잔을 기울였다. 그러는 동안 우리 주위를 반딧불이 한마리가 배회했다. 후배와 나는 더 많은 반딧불이가 있으려나 집 모퉁이를 지나 잣나무숲쪽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더 이상 반딧불이는 보이지 않았다. 숲은 벌레소리로 시끄러웠다.
"올해는 빛이 더 강하네."
처음부터 잣나무골에 반딧불이가 살지는 않았다. 석삼년 지나고서야 한두마리씩 보이던 반딧불이는 요즘 하지를 지나면서 더욱 많아졌다. 빛도 더 강해졌다. 처음에는 희미해서 외등에 비친 물방울인 줄 알았다. 지금은 외등을 압도할 정도로 강해졌고, 불빛 아래도 서슴없이 날아다닌다. 잣나무골에는 모두 세개의 가로등이 켜 있다. 그 중에서 우리 집과 가장 가까운 것은 50m 거리에 있다.
우리 집 마당과 외등 사이에는 10년 이상 자란 왕벚나무와 뽕나무 두 그루가 있어 빛을 완전히 가려주고 있다.가로등빛은 잣나무 숲에도 비치고 이웃들의 정원과 텃밭을 밝혀주기도 한다. 유일하게 어둠이 깃든 곳은 우리 마당이다. 내가 설계할 때의 의도는 '은둔'이었다. 숲 가장자리를 따라 건물을 배치하고, 뒷산의 능선과 지붕을 일치시켜 전혀 드러나지 않는 집이기를 바랬다.그리고 캐노피가 있는 현관 입구를 제외하고는 담장 대신 숲에서 가져온 나무들을 심었다.
그것들이 그새 풍성한 그늘을 만들었고, 외부와도 적절히 차단해주고 있다. 그 마당에 밤마다 반딧불이들이 사랑을 나누러온다. 조금씩 조금씩 빛을 더 키워온 덕에 가로등을 이겨냈으니 반딧불이는 언젠가 더 진화해서 태양을 이길 수 있을 것을 이라고 믿을지도 모를 일이다.
내 영혼의 일부를 숨기고 싶었던 이곳에서 나는 반딧불이의 목숨 건 사랑法을 통해 새로운 소통을 배운 셈이다. 목숨을 걸고 사랑해야는 것들은 무엇인가 ? 가족, 직장, 국가 혹은 나의 이데올로기 ?
고등학교시절, 공부는 잘 하면서도 운동도 젬병이고, 사교적이지도 않는 말 수 적은 친구가 있었다. 워낙 존재감은 없었으나 은근한 내공에 끌려 야간자습 때 간혹 운동장에서 만나 철봉도 하고, 평행봉도 하면서 대화를 나눴다. 그 친구와는 한번도 같은 반이질 않았다. 2학년이 돼서는 나는 이과, 친구는 문과로 나뉘었다.
2학년 봄 체육대회을 앞두고 그 친구는 마라톤에 참가하겠다고 내게 선언하듯이 말했다. 나는 코웃음을 쳤다. "괜히 나섰다가 몸이나 다치지 말고...네게는 참 무모한 도전이야..괜히 포기할걸, 생각지도 마."
드디어 마라톤시간, 반환점을 앞두고 나는 2위 그룹에 있었다. 대략 7∼8명 정도가 경합중이었다. 반환점을 100m쯤 앞뒀을 때 선두그룹이 보였다. 모두 세명. 1, 2위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달리고, 3위가 몇 m 쳐져 있었다. 그런데 아뿔사 ! 맨 선두에 그 친구가 달리고 있었다. 나는 믿기지 않았다. 그가 저렇게 잘 달릴 수 있다는 것을...성난 사자 같았다.
나는 반환점을 돌면서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곧 2위 그룹과 격차가 조금씩 생겨났다. 선두그룹이 막 손에 잡힐 듯 했다. 그런데 또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선두에 있던 친구는 순간 흐느적하더니 푸욱 쓰러지는 것이 아닌가. 너무 놀랐다. 대(大)자로 쓰러진 그의 입에서는 거품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부글부글 쏟아지는 거품은 곧 목덜미로 흘러 내렸고, 눈동자는 하얗게 뒤집혔다.
잠시 선두그룹이 2위그룹과 뒤엉켰다. 자전거로 대열을 이끌던 선생들이 응급조치를 하고, 다른 선생은 선수들에게 계속 달리라고 손짓했다. 친구가 걱정됐다. 그러면서도 달렸다. 쓰러질 듯 힘들었다. 눈이 아렸다. 나는 땀을 훔치며 문득 "그렇구나, 달리려면 거품이 날 때까지 뛰는거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숨이 덜 찼다. 거품이 쏟아지면서 쓰러질 때까지 달리던 친구의 성난 모습. 쓰러졌다는게 멋스러웠다.
목숨을 걸고 사랑을 한다든지, 온 정신을 다해 목표를 향해 전진한다든지 하는 건 내 체질이 아니다. 그런데도 대충 살아가려는 내게 긴장의 끈을 당겨준다. 무모할지라도 혼신을 다하는 거 ! 그래서 반딧불이의 외사랑은 내게 단순한 사색거리로만 다가오지 않는다.
추신: 벗들 !
어두운 들길 걸을 때는 가만가만 걸어라
암껏 부르느라 목쉰 벌레들이 놀라지 않게 숨죽여 걸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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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성 기자 peac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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