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된 사진을 들고 그 자리에서 또 사진을 찍었다.
찍힌 시간과 그 위로 흘러가는 시간이 보였다.
소중한 사람과 단둘이 찍은 사진 한 장 남기는 일이 대단한 의미를 지니던 시절이 있었다. 삶의 중요한 순간 사진을 찍기도 했지만, 사진을 찍는 그때가 삶의 중요한 순간이 되기도 했다. 어렵게 찍은 사진을 뽑아 나누고 남기는 일은 각별한 의식(儀式)이었고, 함께 있었음을 증명할 거라곤 사진뿐일 때가 있었다.

36년 전 신혼여행길 내장사에 들른 부부가 눈 쌓인 대웅전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산천은 의구했고 사찰은 변했고 손에 들린 세월은 가벼웠다. 전북 정읍 내장사, 1976 / 2012. ⓒ허영한
오래전 그렇게 찍은 연인들의 사진들을 어렵게 구해 들고 사진이 찍힌 자리를 찾아 돌아다닌 적이 있다. 사진을 왼손에 들고 오른손에 든 카메라로 사진과 주변의 현재를 찍었다. 모든 것들이 그대로 맞아떨어지지 않아서 아쉬울 것은 없었다. 그대로인 것들과 달라진 것들 사이에서 과거의 한순간이 손에 들려 있었다. 어떤 사진에서는 30년 전 연인들 옆으로 지금의 연인들이 지나갔다.
기억에서는 세월의 간극이 사라지고 여러 시점의 일들이 동시에 일어난다. 시간은 압축되고 공간과 사건은 편집된다. 말도 지식도 일정 시간 익힌 뒤에 드러나는 것의 무게는 다르다. 사진도 시간이 쌓이면 다른 말을 보탠다.
손에 들고 찍은 사진에는 타인의 시간이 보였다. 내 시간을 감당하느라 쳐다볼 겨를 없던 동안 흘러가 버린 타인의 세월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시간은 가져가버린 것들에 대한 보답으로 회한과 탄식이라는 감정의 울림을 돌려준다.
사진 속 사찰의 대웅전은 화재로 소실된 뒤 다시 지어졌다. 다시는 똑같은 사진을 찍을 수 없다. 사진은 찍는 순간 과거가 되어버린다고 하지만, 그것이 그리 한탄할 일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손에 잡히는 사진 위로도 시간이 지나가고 기억이 덧씌워지고 새로운 액자가 만들어진다.
사진의 바깥은 현재이기도 하지만, 현재 시점에 떠올리는 그때의 기억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진을 보면서 사람의 연대기에 집중하지 않고 독립된 개체로서 과거의 어느 순간을 마주할 수 있다. 한 걸음 물러나 지난 시간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사진 속 사실도 사진이 불러오는 기억도 시간의 강 위에서 끊임없이 변하고 사라진다. 사진의 시간은 사진 안에도 있고 사진 밖에도 있다.
허영한 기자 younghan@asiae.co.kr
꼭 봐야할 주요뉴스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