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 교실, 몸짓으로 표현한 학교폭력
학교폭력의 숨은 그림자 '숨은 방관자'
무미건조한 회색 교실, 16개의 책상과 의자에 회색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각자 자리를 찾아 앉는다. 여느 교실 안 풍경처럼 학생, 아니 무용수들이 의자를 뒤로 기울였다 다시 앞으로 향하고, 턱을 괴고 앉았다가 도시 돌아앉는다. 미니멀하고, 리드미컬하게 묘사된 교실은 얼마 전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 오른 정구호 연출의 현대무용 ‘그리멘토’ 무대 공간이다.
다를 것 없이 비슷해 보이는 학생들의 움직임은 조금씩 차이를 보이기 시작한다. 같은 동작을 하는 학생들 사이로 미묘하게 다른 동작을 하는 한 명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15명이 자세를 바꾸면 뒤늦게 한 명이 자세를 따라 바꾼다. 무대 뒤로 'please let me in(들어가게 해주세요)' 글자가 뜨고, 교실 내 계급과 권력이 소리 없이 드러난다.
차이가 표면화된 순간 곧 차별이 이어진다. 8명이 주를 이룬 가해자 그룹은 가벼운 조롱으로 시작해 과격한 폭력으로 피해자를 괴롭힌다. 7명의 방관자는 의자와 책상 아래로 몸을 숨기고 피해자를 지켜본다. 동정도, 연민도, 흔들림도 없는 시선 속에는 어쩌면 내가 피해자가 아니라 다행이라는 안심과 무자비한 폭력 앞에 어떻게 나설 수 없는 무력함이 뒤엉켜 가라앉아있다.
폭력이 극단으로 치닫는 사이 등 돌린 방관자들이 변화해 가해자들을 몸으로 막아서기 시작한다. 방관자들과 가해자들이 맞설 때, 벼랑 끝으로 내몰린 피해자는 무대 뒤 의자와 책상으로 쌓아 올린 탑 위에 홀로 위태롭게 서서 이들을 내려다본다. 정적이 흐르고 이내 한 여학생이 탑 위로 올라가 피해자의 손을 잡고, 다른 학생이 또 그 여학생의 손을 잡는다.
꼭 봐야 할 주요 뉴스
"우리도 이제 월급이 1000만원" 역대 최고…'반도...
작품 마지막 장엔 둘씩 마주 앉은 학생들이 서로 이야기를 듣고 손을 잡으며 위로를 건넨다. 공연 말미엔 책상 위에 엎드린 피해자를 핀 조명이 비추면 관객석에서 누군가 무대 위로 올라가 그를 안아준다. 방관자였던 이도, 가해자였던 이도 모두가 그를 끌어안으며 공연은 끝을 맺는다.
작품이 올라간 시기, 역시 학교폭력을 주제로 한 드라마를 통해 큰 인기를 얻은 한 배우의 과거 논란이 세간을 시끄럽게 했다. 그는 자신이 일진 모임에 가입한 적은 있으나 직접적인 폭언이나 폭행 가담은 일절 없었고 다만 방관자였음을 시인했다. 그가 가입했던 모임은 해당 지역에서는 잘 알려진 일진 그룹이었고, 직접 가담하진 않았어도 해당 그룹의 멤버들로 인한 학교폭력 사례가 있었음을 그는 당시 스스로 인지하고 있었다. 문제가 처음 불거졌을 당시 그는 "저를 합리화하기에 바빴다. '나 정도는 가해가 아니잖아'라며 애써 외면했다. 그런 생각들 자체가 문제였다. 사과하고 싶다"고 입장을 전했다. 뒤늦은 방관자의 사과이자 고백이었다.
학생들 다수가 학교에서 일어나는 학교폭력에 개입하면 자신 또한 피해를 본다고 생각해 방관자가 되곤 한다. 정구호 연출은 “‘그리멘토’는 학교폭력에 맞서는 방관자의 이야기다. 방관하는 사람들이 목소리를 내고 맞서 싸우자는 메시지를 담았다”며 “특히 학교폭력 문제는 아무리 강조해도 반복해도 지나치지 않은 주제”라고 강조했다. 전문가들 역시 '방관도 가해행위'라는 사실을 알리고 인식을 바꾸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학교 현장과 기관에서도 '방관도 가해'라는 인식을 모두가 가질 수 있도록 다각도의 지원과 홍보,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