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김희윤 기자] 가곡에 대한 깊은 사랑으로 직접 작사·작곡한 7편의 가곡을 지난 5월 공연에서 선보인 배우 강석우는 “우리말이 주는 정서, 차분하게 마음을 울리는 그 아름다움이 서양 가곡과 견주었을 때 우리 가곡이 갖는 매력”이라고 소개했다. 1980년대만 해도 가곡만 전문적으로 소개하는 TV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고, 9시 뉴스 직전엔 가곡 뮤직비디오가 약 5분간 빠짐없이 편성됐다. ‘보리밭’이나 ‘선구자’ 같은 가곡을 장기자랑에서 부르는 이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지만 이후 가곡은 가요계 환경 변화와 독일·이탈리아 가곡과 오페라 등을 중심으로 재편된 성악 교육 프로그램의 변화로 대중에게서 점차 잊혀갔다.
한국 최초의 가곡에 대해서는 아직도 연구가 진행 중이지만 보편적으로 홍난파의 ‘봉선화(1922)’와 박태준의 ‘동무생각(1922)’을 효시로 언급한다. 가곡이 탄생한 1920년대는 일제의 탄압으로 민족의 고통이 극심한 시기였다. 시인 김형준은 일본으로부터 핍박받는 조선 민족의 애환을 시들어가는 봉선화에 빗대 글로 적은 뒤 이웃에 사는 작곡가 난파 홍영후가 의뢰한 곡에 가사로 붙였다. ‘울밑에 선 봉숭아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길고 긴 날 여름철에 아름답게 꽃필 적에/어여쁘신 아가씨들 너를 반겨 놀았도다’ 나라 잃은 슬픔에 절망하던 민중들에게 우리말로 지은 시에 노래를 붙인 가곡은 망국민의 슬픈 자화상이자 때로는 따뜻한 위로가 되는 친구로 그 곁을 살뜰히 지켰다.
해방 후 한국전쟁과 산업화 시기를 거치며 가곡은 전성기를 맞는다. 전국 각지에선 가곡의 밤 음악회가 성황을 이뤘고, 음악을 사랑하는 대학생들의 창작열은 대학가곡제를 통해 다양한 명곡을 탄생시켰다. 1회 대학가곡제 대상 수상자인 김효근 이화여대 교수는 경영학자의 길을 걷고 있지만 작곡가로도 활약하며 ‘내 영혼 바람되어’, ‘첫사랑’ 등의 명가곡을 발표했다. 그의 가곡 13곡만으로 꾸민 뮤지컬 ‘첫사랑’은 지난 9월 초연 무대에서 독특한 정취와 낭만을 선사하며 가곡 뮤지컬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첫사랑’을 연출한 극작가 오세혁은 “시어로 구성된 가곡은 짧고 담담한 한 줄 가사 속에 순간의 감정을 넘어 오랜 시간과 세월을 통해 다지고 저며 함축된 서사가 담겨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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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인기가 시들해지면서, 또 대중가요의 다변화에 반해 고전 어법을 고수한 가곡은 대중에게서 차츰 멀어졌다. 여기에 격동의 역사 속에서 가곡을 만든 작사가와 작곡가의 친일 행적은 가곡의 운명까지 바꿔놓았다. 최초의 가곡을 만든 홍영후, ‘진달래꽃’과 ‘가고파’의 김동진, ‘선구자’의 조두남, ‘그 집 앞’의 현제명 등 초기 가곡의 기반을 다진 이들이 모두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리면서 대중의 사랑을 받던 대표곡들 또한 무대에서 배제되기 시작했다. 가곡에 드리워진 근현대사의 암영이었다.
공자는 논어 태백편(泰伯篇)에서 ‘흥어시(興於詩) 입어례(立於禮) 성어악(成於樂)’, 즉 시로 흥을 돋우고 예로 뜻을 반듯하게 세워 음악으로 인격을 완성한다고 했다. 대중의 삶과 생활을 담은 우리말의 아름다움이 녹아있는 가곡은 그 자체로 음악이자 예술이고 기록이자 문화다. 지난 8월 ‘한국 가곡의 밤’ 무대에 선 미국 성악가 엔리코 라가스카는 “한국 가곡은 아름다운 산과 강, 바다의 정경을 그림으로 보여주듯 풍부하게 표현해 기계적 가창보다 정서가 두드러진 독창적 음악”이라고 정의했다. 한국 가곡 100년, 섬처럼 멀어진 가곡을 주제로 한 다양한 무대와 공연이 사랑의 가교처럼 우리 곁을 다시 찾아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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