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원 잔혹사①] "칼로 찌르겠다 수차례 협박"…눈물의 메모
["오늘도 참는다"…은행원 잔혹사] 시리즈
<1>"칼로 찌르겠다 협박" 눈물의 메모
<2> 좋은 지점장, 나쁜 지점장
<3> 괴롭힘 민원은 늘고 있다
[아시아경제 송승섭 기자, 심나영 기자] 4년차 은행원 서주연(31·가명)씨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파르르 떨렸다. 모니터에 고객의 특이사항을 입력하는 칸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머릿속이 하얬다. '상담 도중 칼로 찔러 죽이고 싶다고 수차례 협박. 3년전 자기를 비웃은 은행원이 있어서 화가 났다고 함' 두 줄을 겨우 쓴 서 씨는 괴로운 듯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정말 칼을 들고 온 것도 아니잖아. 우리 모두 무사하니까 그만 잊어버려" 옆에 있던 선배 행원은 위로 같지 않은 위로를 건냈다.
블랙컨슈머 대응 용도로 은행원들 사이에서만 볼 수 있는 메모가 있다. '비망(備忘)'이라고 불리는 이 메모는 악질 고객 행패를 기록하는 용도로 쓰인다. 원래 취업이나 이직, 결혼, 주택 매매 같은 참고해야 할 고객들의 개인사나 문의 내용을 적어두기 위한 용도였다. 그런데 진상 고객 때문에 업무 차질이 빚어지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어느새 비망은 은행원들이 돌려봐야 할 필수자료가 됐다.
비망 돌려보며 진상고객 대비
2년차 은행원 강선재(28·가명)씨는 “스트레스가 극심하다 보니 은행업 종사자들끼리 서로 돕기 위해 진상 고객은 꼭 적어두는 편” 이라며 “미리 아는 것만으로도 조심할 수 있고 덜 당황하게 된다”고 귀띔했다. 블랙컨슈머 정보를 한 번만 기록해두면 본인 뿐 아니라 다른 지점의 동료 직원들도 함께 볼 수 있기 때문에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다. 경찰 신고와 수사가 이뤄질 때 활용하기도 한다.
“대출 연체된 고객에게 전화를 해 안내 했더니 다음날 창구에 찾아와서 낫을 꺼내더라고요. 휘발유와 유황가루를 구해뒀으니 밤길 조심하라면서요.” (3년차 은행원 차현주(30 ·가명)씨) 사례를 비롯해 '손으로 사과문 200장 쓰고, 은행장도 따로 사과문을 써서 직인을 찍어 공증받고 보내라. 안 그러면 금융감독원에 민원 넣겠다' '나는 파워블로거다. 해달라는대로 안해면 블로그에 올리겠다' '내가 보이스피싱을 당한건 은행 때문이다. 행장을 고발하겠다' '은행 점검시간에 인터넷뱅킹을 썼어야 했는데 못썼다. 돈으로 피해보상 해달라' 는 식의 블랙컨슈머에게 괴롭힘을 당한 일들은 비일비재하다.
타깃은 주로 여성 신입 행원들이다. 시중은행의 민원팀장은 "은행 내에서 피해 사례를 접수 받는데 주로 연락이 오는 건 입행한지 몇년 안된 여성 신입 직원들"이라며 "약해보이는 상대들만 골라 괴롭히는 게 블랙컨슈머들의 전형적인 행동"이라고 했다.
부실한 직원보호, 민원 접수되면 점수 깎여 쉬쉬
은행원들이 메모로나마 진상고객을 구별하려는 배경에는 부실한 직원보호 시스템이 자리하고 있다. 경기 지역 지점에서 5년째 일하고 있는 김석주(36·가명)씨는 “직원을 보호하려는 조치는 딱히 없고 창구에 있는 직원들이 난감해하면 차장급 이상 선배가 와서 도와준다”며 “블랙컨슈머 대응은 사실상 지점에 있는 책임자급 상사의 문제 해결 역량에 의존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정신적 피해를 입어도 맞대응을 못하는 건 민원 접수가 평가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은행은 소속직원을 핵심성과지표(KPI)로 점수를 매기는데, 민원이 접수되면 KPI 점수가 깎일 확률이 높고 지점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특히 승진을 노리는 부지점장과 지점장이 있는 지점일수록 진상고객에 휘둘린다는 게 은행원들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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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이 은행원들의 정신건강 상태는 나빠질 대로 나빠졌다. 지난해 '사무금융노동자 업무상 정신질환 실태 및 대응 연구 결과' 보고서(이유민 서울성모병원 직업환경전문의·김영선 노동시간센터 연구위원) 에 따르면 '지점·현장영업·보상'직군에서 일하는 은행원들 중 91.8%가 '감정 부조화 증상'을 보였다. 설문자의 40.2%는 수면질환을, 27.0%가 우울증을, 22.6%는 불안장애를 겪고 있었다.
심나영 기자 sny@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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