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 굽는 타자기] 어떤 나무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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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나무들은/최승자 지음/난다/1만6000원)


[아시아경제 박소연 기자]만약 절망에게도 힘들 때 끌어안을 부모가 있다면 최승자의 시(詩)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으리라. 수많은 청춘들과 황홀한 고통의 시절을 함께 한 최승자 시인이 낯선 외국 생활을 일기로 쓴 산문집이 재출간 됐다. 시인의 일기를 들여다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어떤 하루는 먹먹하고, 또 다음날은 피식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승자는 행복해 지기를 두려워한다.” 함께 생활했던 외국인 작가 친구 한 명은 그를 이렇게 평가하기도 했다.

최승자 시인의 두 번째 산문집 ‘어떤 나무들은’이라는 책은 원래 1995년에 출간됐다가 26년 만에 다시 출간됐다. 미국 아이오와대학 ‘인터내셔널 라이팅 프로그램(IWP)’ 참가를 계기로 처음 외국에 나간 최승자 시인은 1994년 8월 26일부터 1995년 1월16일 월요일까지의 기록을 이 책에 담았다.


미처 커피믹스를 챙겨가지 못해 아메리카노에 적응을 못하고 해롱거리는 시인, 라면만 끓여 먹다가 아시안 식품가게에서 다시다·미역·마른오징어·김·김치 등을 사들고 행복해 하는 최승자. 또 서점에서 우연히 폴오스터의 ‘굶기의 예술’이라는 책을 제목만 보고 샀다가 심취해서 한국어 번역까지 결심하는 작가의 모습. 함축된 언어로만 자신을 표현해 온 시인의 소소한 생활인으로서의 모습이 친근하다. 이에 더해 시인의 예술과 사람, 삶에 대한 관점까지도 들여다볼 수 있는 책이다. 그는 폴오스터에 대해선 ‘정말로 나와 어떤 부분이 일치하는 것 같은, 내가 오래전부터 알아 온 것 같은 이상한 친밀감을 주는 작가다.’라고 적었다.

자신의 시를 영어로 번역해 해외 작가들에게 소개하기 위해 골머리를 앓는 장면도 나온다. 예를 들어 ‘내게 새를 가르쳐 주시겠어요?’라는 구절을 번역하는데 시인 본인은 "Would you teach me a bird?"라고 번역을 한다. 영어 원어민 친구가 어색한 번역이라면서 "about being a bird‘ 혹은 ’a birdness”라는 단어를 추천하지만 시인은 강력하게 거부한다. 그렇게 하면 이 시구는 죽어버린다는 것이다. 새라고만 말하면 그건 제한되지 않은, 갇혀 있지 않은 어떤 무한한, 자유로운 상태를 떠올리게 할 수 있지만 친구가 제시하는 단어들은 이미 그 자체가 새의 이미지를 제한하고 있어 자유로운 상태를 보여줄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Would you teach me; a bird?”라는 문장이 된다. 세미콜론(;)이 새를 지킨 사연이다.


최승자 시인은 1990년대 후반부터 정신분열증을 앓으면서 정상적인 활동이 쉽지 않았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언제부터인가 노장(老莊)·명리학·사상의학·점성술 등과 같은 신비주의 공부에 빠졌다”며 “그 공부에 빠지면서 나를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1994년 아이오와대학 초청으로 넉 달 간 미국에서 지내면서 점성술을 접한 것도 계기가 됐다고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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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도 그 변화의 단초가 미미하게 감지된다. 11월로 접어들면서 작가의 일기는 조금씩 어두워진다. 그는 서글픈 생각이 든다고 했다. ‘다시 한 챕터가 끝나가고 있다는 생각. 뭔가가 내 속으로 가라앉을 거라는 걸, 뭔가가 나를 변화시켰다는 걸, 그리고 앞으로도 당분간 그것은 보이지 않는 잠재적인 힘을 갖고 내 의식과 무의식에 작용할 거라는 걸 안다’고 했다. 그는 또 12월 일기장에는 이렇게 쓴다. ‘얼마 전부터 나는 내 육체가 불안해하고 내 무의식이 불안해하는 것을 느꼈다.’ 네 달이 조금 넘는 이 기록에는 첫 타지살이를 앞둔 최승자의 설렘과 불안부터 다음 생으로 나아가는 모습까지 고루 담겨 있다. 시인과 조금 더 친해진 느낌이다.


박소연 기자 mus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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