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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동여담] 홍의장군의 용기

최종수정 2019.07.11 13:00 기사입력 2019.07.11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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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아시아경제DB)

(사진=아시아경제DB)



[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 임진왜란 직후인 1600년 2월, 영남지역의 군무를 총괄하는 경상좌병사가 조정에 상소문을 올렸다. 이 상소의 주요 내용은 왜(倭)국과 화친해야한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조선조정은 화친을 요청하기 위해 일본에서 보낸 사신을 구금해버린 터였다. 해당 상소문에는 사직하겠다는 내용도 함께 담겨있었고, 실제로 상소문이 조정에 당도하자마자 경상좌병사는 곧바로 낙향해버렸다.


조선 조정은 바로 발칵 뒤집어졌다. 치가 떨리는 임진왜란을 당한 직후 일본과 화친을 논하는 것은 목을 내놓는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조정대신들은 곧바로 이 자를 체포해 형벌을 가해서 일본과 내통한 것인지 조사해야한다고 왕인 선조에게 빗발치듯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왕조차도 그에게 함부로 중형을 내릴 순 없었다. 그가 다른 사람도 아닌,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한 의병장이었기 때문이다.


일본과 화친하자 주장한 경상좌병사의 이름은 곽재우다. 홍의장군(紅衣將軍)으로 유명한, 임진왜란 당시 최고로 활약한 장수 중 한 사람이다. 그 누구보다 앞장서서 왜군에 맞서싸웠고 일본에 대한 분노 역시 하늘에 닿은 인물이었지만 그는 화친을 주장했다. 곽재우는 "적국을 통제하는 것 중 화친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며 "왜구의 원한을 도발시켜 망국의 화를 불러들여선 안된다"고 주장했다.


임진왜란으로 조선왕조는 국토 대부분이 폐허가 됐다. 식량생산량은 전쟁 전의 3분의 1로 급감했다. 이런 상황에서 북쪽에 국경을 둔 청나라까지 발흥하며 동맹국인 명나라와 조선을 동시에 위협하고 있었다. 변동성이 매우 커진 국제환경 속에서 일본과의 화친은 굴욕적이지만 반드시 성사 돼야 할 외교적 급선무 과제였다. 그러나 조정대신들은 물론 왕조차도 반일감정을 거스르며 화친의 시급함을 주장한 이가 없었다. 곽재우는 이런 상황에서 나라의 명운을 위해 목숨을 걸고 화친을 주장했던 셈이다.


이 일로 곽재우는 다시는 벼슬길에 나오지 못하게 됐지만, 그의 화친 주장은 광해군으로 정권이 교체된 직후인 1609년 일본과 기유약조가 맺어지면서 결실을 본다. 그 덕에 조선은 정묘ㆍ병자호란을 거친 위기상황에서도 일본의 침략을 피할 수 있었고, 조선과 일본은 이후 250여년간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지금의 반일감정과는 비교도 안될 그 상황에서, 홍의장군처럼 목숨을 걸고 화친을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이 현재 우리 정치권에 몇 명이나 될까.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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