엎질러야만 얼굴을 보이는 물의 심중을 차마,라고 하자
 흘러가고 흘러오는 것들이 통과해 가는 바람 꾸러미 같은

[오후 한 詩]투명한 발음/정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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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빛이 물 위를 떠돈다


 한 그릇의 물에 비정형의 무게가 더해진다

 물 위에 떠 있는 건 젖지 않는 것들의 귓속말
 아직도 닿지 못한 마음이 둥둥 또다시 둥둥,
 물의 얼굴에서 자신을 건져 올리는 허우적거림이
 차마,라는 말의 가장자리다


 엎질러지고 말 한 그릇의 물에 너무 깊은 말이 담겨 있다

 젖은 흙의 낯빛으로 물이 자신을 지울 때
 엎질러진 물의 안색으로 우리는 얼굴을 빚고 자신을 쓸어내린다
 한 그릇의 물결이 어두운 얼굴 위에 번진다


 버들잎 같은 눈빛을 후우 불면
 차마,라는 말 위에 올려진 속눈썹이 젖는다
 치렁거리는 밤과 낮의 버드나무 속으로 한 그릇의 물이 스며든다
 소리 없이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통과해 가는 물관 속으로
 후우 후우 겹겹의 바람이 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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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시간 위로 엎질러진
 혀를 댄 적 없는 한 방울의 차마,
 그건 누구의 말도 아니어서 우리 모두의 투명한 채액
 물의 발음이다


  
■'차마'의 사전적 의미는 '부끄럽거나 안타까워서 감히'다. 내가 참 좋아하는 이 단어는 그런데, 주로 부정문의 형식에 자주 쓰인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말이 험상궂거나 매몰찬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하도 애틋해서 어떤 슬픔을 건넌 살뜰한 정이 느껴지곤 하는데, 아마도 저 '감히'라는 맥락 때문인 듯하다. '부끄럽거나 안타까워서'가 '차마'의 안쪽을 가리킨다면, '감히'는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애쓴 마음의 흔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만 엎질러져 버린 안타까운 시간들을 매만지고 자꾸 되새기는 그런 고되나 다정한 마음 말이다.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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