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로 북카페]한여름밤 '하루키 월드' 다시 열린다
장편소설 '기사단장 죽이기', 국내 출간되자마자 2·3위
30~40대의 상실감 따스하게 어루만지는 '하루키다운' 매력
[아시아경제 장인서 기자] "단문이 소비되는 요즘 읽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는 글을 쓰는 것이 저에게는 중요한 일입니다. 이야기라는 것은 즉각적인 효력은 없지만 시간의 도움을 얻어 반드시 인간에게 힘을 준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되도록 좋은 힘을 주고 싶다는 것이 저의 바람입니다."(4월17일 일본 아사히신문ㆍ무라카미 하루키 인터뷰)
'우리 시대의 이야기꾼' 무라카미 하루키(68)의 신작 출간 소식에 서점가가 들뜬 분위기를 이어가고 있다. 하루키가 4년 만에 내놓은 장편소설 '기사단장 죽이기(1ㆍ2권)'는 12일 정식 출간돼 이날 오전부터 서점에 진열됐다. 그러나 앞서 지난달 30일 시작된 인터넷서점 예약판매 때부터 구매 수요가 몰리며 발간과 동시에 6월 둘째 주 베스트셀러 2위로 순위권에 새로 진입했다. 소설은 아내에게 갑자기 이별을 통보받은 30대 중반 초상화가의 이야기를 담았다. 현실과 비현실, 실재와 관념을 오가며 구축한 이야기의 세계는 독자들에게 '하루키 월드'에 대한 환상을 또다시 심어주고 있다.
아시아경제는 지난 6일부터 12일까지 팔린 책을 대상으로 베스트셀러 순위를 매겼다. 교보문고ㆍ예스24ㆍ알라딘 등 주요 온오프 서점의 판매량 순위를 참고하되 본지 문화팀 기자들의 평점을 가산, 종합점수를 집계했다. 김영하 소설 '오직 두 사람'이 13일 현재 1위, 하루키 신작 소설 기사단장 죽이기 1, 2권이 나란히 2~3위에 올랐다. 6월 다섯째 주 1위였던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잠1'은 6위로 다섯 계단 내려갔고, 김애란 신간 소설 '바깥은 여름'이 8위로 두 계단 상승했다. 소설(6권)과 시ㆍ에세이(2권) 장르의 인기가 높았고 인문 장르에서 윤홍균의 '자존감 수업'과 이기주의 '말의 품격'이 10위 안에 들었다.
하루키는 전 세계에 팬덤(추종자들)을 두고 있는 스타작가다. 이번 신작은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2013)' 이후 4년 만에 내놓은 소설, 분량과 내용면에서는 '1Q84(2009)'를 잇는 대작이라는 점에서 더 큰 기대를 모으고 있다. 실제 기사단장 죽이기 예약판매량은 지금까지 나온 하루키의 모든 작품 중 가장 높다. 인터넷서점 알라딘에서 지난달 30일부터 이달 10일까지 예약판매된 기사단장 죽이기 1권은 4979권이다. 이는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의 3배, 1Q84의 3.7배 수준이다. 9000부를 예약판매한 교보문고는 12일 오후 6시까지 2000부를 더 팔았고, 예스24에서는 예약판매로 총 1만6600부가 나갔다. 신간 소식과 더불어 전작 판매량도 높아졌다. 인터파크도서에서는 지난 2∼11일 '1Q84' '해변의 카프카' '노르웨이의 숲' '여자 없는 남자들'의 판매량이 이전 동기간(6월22일∼7월1일) 대비 47% 늘었다.
하루키 열풍은 30, 40대 독자가 이끌고 있다. 교보문고에서 예약판매된 기사단장 죽이기의 성ㆍ연령별 구매 비중을 살펴보면 30대가 45.5%(남 19.3%ㆍ여 26.2%), 40대가 30.8%(남 14.3%ㆍ여 16.5%)를 차지했다. 이어 20대 12.8%(남 6.6%ㆍ여 6.2%), 50대 8.5%(남 4.6%ㆍ여 4.0%), 60대 이상 1.7%(남 1.4%ㆍ여 0.4%) 순으로 나타났다. 예스24에서도 30대가 42.0%(남 21.4%ㆍ여 20.6%, 7월 5~11일 기준)로 가장 높고, 이어 40대 36.2%(남 17.2%ㆍ여 19.0%), 20대 11.0%(남 6.7%ㆍ여 4.3%), 50대 8.5%(남 4.8%ㆍ여 3.7%) 순이었다. 예약구매자 평균 연령(알라딘 집계 기준)은 '1Q84' 출시 당시 34.5세에서 37.0세로 많아졌다.
하루키 소설의 매력은 뭘까. 신형철 조선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는 "작품이 가지는 보편성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자아상실과 회복'이라는 초시대적 테마(주제), 탐색(모험담)의 구조, 인물의 내면을 정직하게 설명하는 섬세함, 오페라 등 서구문화의 자연스러운 융합이 하루키 스타일을 완성한다고 했다. 그는 "'잃어버린 나를 찾아서'와 같은 서사는 이야기의 보편적이고 근원적인 매력을 독자들에게 보여주기에 충분하다"고 설명했다.
소설 속 화자는 서른여섯 살의 초상화가다. 그는 아내로부터 갑작스러운 이혼 통보를 받은 뒤 집을 나와 친구 아버지이자 저명한 일본화가 아마다 도모히코가 살던 산속 아틀리에에서 지낸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천장 위에 숨겨져 있던 도모히코의 미발표작 '기사단장 죽이기'를 발견한 뒤 기이한 일들을 연달아 겪는다. 아내와의 이별, 고독한 여행, 폐쇄 공간, 불가사의한 존재와의 만남, 반복되는 성애 묘사 등 신작에는 그가 전작에서 쌓아올린 '하루키 세계'의 모든 요소들이 집대성돼 있다.
윤상인 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교수는 "지금까지 하루키가 보여준 소설언어의 가장 큰 특징은 탈 역사적인 관점에서 한 개인의 환상세계를 구축하는 것"이라면서 "묵직한 사회적 의제를 던진다기보다 외부에서 고립됐을 때 오히려 온전하게 만들어지는 세계"라고 했다. 이렇게 완성된 하루키 세계는 탈 전통, 탈 자본주의시대의 흐름과 맞물려 개체화돼가는 개인이 겪는 허무와 상실감을 감미롭게 어루만져주며 '위안의 기능'을 발휘한다고 했다. 윤 교수는 "하루키의 작품에 대해서는 늘 상반된 평가가 있었다"면서 "대중문학으로의 가치와 별개로 정치사회적 문제의식을 작품 속에 깊이 있게 구현하는 데는 한계를 보여 왔다"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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