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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진희의 전시포커스]해·달에 기하학, 민화가 더 정겨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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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자의 달, 2016년

은자의 달,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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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고(乃古) 박생광 화백이 거의 유일해요. 한국 화가로서 바라보고 따를 만한 사람이요. 그가 추구한 작가적 지향점을 껴안으면서, 새로운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늘 생각해요."

인터뷰를 하는 도중에 고 박생광(1904~1985년) 화백의 이름을 듣고 놀랍고도 반가웠다. 우리네 정신과 삶을 화폭으로 절절하게 보여준 화가 박생광을 가슴에 새긴 이가 또 있었다. 작가 이희중(61)의 그림을 좀 더 이해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내고는 민화에 등장하는 용이나 호랑이, 전봉준과 같은 역사적 인물과 부처와 보살, 예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그림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그림은 불교 탱화나 무신도가 연상될 정도로 화려하다. 뚜렷한 윤곽선과 색감, 그림에 담긴 소재와 내용이 박생광을 '민족 화가'로 불리게 했다.

이희중의 그림은 이런 박생광의 세계와 맞닿아 있지만 이를 전혀 다르게 표현한다. 그의 작업은 추상과 구상을 넘나들다가 최근 기하학적 문양과 기호들로 가득 채운 그림들을 많이 제작했다. 달과 별과 해, 은하수와 불꽃같은 형상들이 화면을 수놓고 있다. 전통적 산수화와 문양들을 작가만의 조형으로 탈바꿈시킨 상징기호나 상형문자처럼 느껴진다. 이런 기호와 문자들은 유기적으로 연결되고 얽혀있다. 여기에 진중하고 경쾌한 색채의 대비, 수묵처럼 번진 배경 속에 입체적으로 찍혀진 무수히 많은 점들의 운율도 있다.

이희중 작가

이희중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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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화가 박생광 화백과 지향점 같지만
상징기호·상형문자 등으로 다르게 표현
獨유학시절 현대적 해석 선보이며 두각
내달 15일까지 서울 합정동 메세나폴리스 내 갤러리서 전시


이희중이 서른일곱 번째 개인전을 연다. 전시를 사흘 앞둔 지난 20일 서울 구기동에 있는 그의 작업실을 찾았다.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그려온 작품을 빈틈없이 보관한 공간을 지나니 그가 있었다. 크고 작은 유화그림만 600여점, 수채화나 드로잉처럼 종이 그림은 1000여점이나 된다고 했다.

이번 개인전에서는 '우주'를 테마로 그린 기하적인 추상 연작들을 중심으로 보여줄 예정이다. 이와 함께 작업실에는 구상성 짙은 산수풍경과 민화풍 소재들을 담은 그림들도 많았다. 모두 작가 특유의 방식으로 과거의 조형적 감각을 현대의 것으로 재구성한 작품들이다. 주로 밤을 배경으로 해 달과 별과 산, 나비와 소나무, 지팡이를 든 선비, 석류와 소라, 잉어, 탑 등 무수히 많은 도상들이 그림 안에 담겨있다. 이 중엔 첩첩산중을 표현한 창칼 같은 바위, 옛 도자기에 자주 등장하는 포도 덩굴과 동자도 보인다. 우리 옛 지도에서 쓰인 '부감법'(여러 풍경을 훑으며 내려다보는 그림 방식)을 차용한 기하하적 그림도 눈길을 끈다. 작품들은 정감어린 표현과 함께 몽환적이고 비밀스러운 느낌도 자아낸다.

이희중은 1980년대 말 독일 유학 시절부터 우리 산수화와 민화를 현대적으로 계승해 선보이면서 두각을 드러낸 작가였다. 1991년 귀국 후에는 국내 답사를 꾸준히 다니며 마주한 풍광을 화폭에 구체화했다.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부모님이 계신 경기도 벽제에서 살았다. 중고 '프라이드'를 구입해 전국 곳곳을 돌아다녔다. 옛 그림에 원근법이 필요 없는 이유가 있더라. 산이 첩첩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시골 무덤가의 소나무, 밤 풍경들에 매료됐다." 그의 작업실 안에는 오래된 수묵화와 서예 작품들이 몇 점 걸려 있다. 4년 전부터 고미술품을 수집중이라고 했다. 작가는 "옛 작품들을 보며 한국의 정신을 느끼고 싶었다"고 했다.

청포도, 2014년

청포도, 20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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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문자, 2010년

푸른문자,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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첩첩산중, 2014년

첩첩산중, 20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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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광, 2012년

월광, 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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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과 용, 155*145cm,1986년

산과 용, 155*145cm,198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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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어떻게 화가가 됐을까. '화가'가 되겠다는 꿈을 품은 시기는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르네상스시대 대표 예술가인 미켈란젤로의 전기에서 천정화를 그리다가 얼굴이 틀어졌다는 대목을 읽고는 "나도 그림에 몰두하겠다"고 다짐했다. 집안 배경도 영향을 미쳤다. 아버지는 초등학교 미술교사였고, 작은아버지는 당시 잘나가던 삽화가인 이승만씨였다. 작가는 어릴 적부터 그림을 곧잘 그린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다. 하지만 꽤 오랫동안 아버지의 반대에 가로막혔다. 아버지는 장남인 그가 화가 아닌 다른 길을 걷기를 바라서였다.

이희중은 뚜벅뚜벅 자신의 길을 걸었다. 그는 "미대에 입학했을 당시엔 단색화 계열 화가들이 대학교수들이었다. 밖에선 민중미술이 태동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나는 나를 지키고 싶었다. 나만의 그림을 찾고 싶었다"며 "군대를 다녀오고 1981년 국내에선 처음으로 열린 독일현대회화 전시가 있었다. 환경문제를 다루는 그림, 설치작품 등이 나왔는데 충격을 받았다. 예술이 꼭 예쁘지 않아도 되는구나. 작품에는 생각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고 했다.

그는 독일 유학을 결심했고, 뒤셀도르프 쿤스트 아카데미에 들어갔다. 서른 살 늦깎이 유학생이었다. 가난했고, 초반엔 어떻게 자기 그림을 만들어갈지 몰라 방황도 했다. 너무 힘이 들어 캔버스에 검정 물감을 뿌려대다가, 문득 그 형상에서 예전에 그린 민화 풍의 수채화를 떠올렸다. 그 캔버스에 그림을 그려나갔다. 황토빛 배경에 검은색 선으로 옛 지도처럼 형상화한 산수가 오롯이 드러났다. 이 그림에 '산과 용'(1986년작)이란 제목을 붙였다.

자신감을 얻은 화가는 그때부터 독일에서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뒤셀도르프시 미술공모전에서 당선되자 여러 화랑에서 그의 그림을 구입해갔다. 한국에서도 초대전 요청이 들어왔다. 이즈음 아내가 둘째를 임신하면서 귀국을 결심했다. 그는 "유학생활을 할 때도, 한국에 돌아온 이후에도 돌이켜보면 힘들어서 포기할 뻔할 때마다 기회가 왔다. 그림을 그리겠다는 의지, 자기 방식을 갖는 작업이 중요했다"고 회고했다.

이희중의 작품들은 현재 독일 뒤셀도르프 쿤스트뮤지엄, 슈타트 슈파카세 은행, 미국 UN본부를 비롯하여, 국립현대미술관, 성곡미술관, 모란미술관, 강북삼성병원, 한국은행 등 수십 곳에 소장돼 있다. 이번 전시는 23일부터 다음달 15일까지 열린다. 서울 합정동 메세나폴리스 2층 인사갤러리. 02-735-2655.



오진희 기자 valer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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