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링컨'을 보기 전에 알아두면 좋은 몇 가지 사실들
[아시아경제 나주석 기자] 지난 1월 13일 제70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는 작은 소동이 있었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시상식에 나타난 것이다. 그가 영화 시상식에 나타난 것은 한 영화를 소개하기 위해서였다. 세계적 거장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만들었고 최고의 배우로 손꼽히는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출연한 영화 '링컨'이었다.
이 영화는 미국에서 평단과 관객들의 극찬을 받았지만, 한국인들이 보기에는 대사만 많고 이해하기 난해한 영화로 받아들여진다. 당시 미국의 정치 상황 및 제도에 대한 이해가 없을 경우 이야기가 전해주는 내용을 온전히 전달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때문인지 한국의 한 정치인이 영화 링컨을 본 뒤 "정치는 결과를 내는 것"이라는 매우 독특한(?) 교훈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보기에 따라서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이 영화가 왜 미국인들에게 감동을 줬는지 알고, 또 영화가 주는 메시지에 대한 엉뚱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에 관한 정보를 약간쯤은 알고 가는 것이 좋을 듯하다. 여기에서는 영화 링컨을 보기 위해 알아주면 좋은 몇가지 사실들을 소개한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는가.
1. 남북 전쟁은 왜 발생했는가?
미국 남북전쟁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은 이렇다. '1861년부터 1865년까지 미국의 노예 제도의 존폐를 둘러싸고 연방의 분리를 주장했던 전쟁'이다. 좀 더 경제적인 분석을 하는 이들은 산업화를 지향하는 북부와 목화 농업 등 플렌테이션 농업을 중심으로 하는 남부 지역의 경제적 이익의 차이가 전쟁을 불러 일으켰다고 설명한다.
남북전쟁 발발 당시에는 흑인 노예제에 대해 주별로 상이한 법을 적용했다. 북부 지역들은 자유주(free state)라고 불리며 노예제를 받아들이지 않지만, 남부 지역은 노예제를 받아들였고 노예주(slave state)로 불렸다. 자유인들의 나라라던 미국에서 노예제가 존재했던 건 미국 헌법이 노예제를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부 급진적인 노예 해방론자들은 남부주에 있는 흑인들에 대한 즉각적인 해방을 원했지만, 전체 북부인이 그러한 의견에 찬성한 건 아니었다. 헌법도 인정하고 있는 만큼 현 상태를 유지하자는 목소리가 컸다. 양측의 입장이 첨예하기 갈리기 시작한 건 미국의 영토가 확대됐기 때문이다. 오늘날 미국은 대서양에서부터 태평양에 이르는 영토를 갖고 있지만, 과거에는 대서양 연안에 한정됐었다. 미국인들의 지속적인 영토 확대 과정을 통해서 영토가 늘어났는데, 이 과정에서 새롭게 미국 영토에 편입된 서부지역들을 노예주로 할 것인지, 자유주로 할 것인지 양측간의 입장이 엇갈렸다.
남부 입장에서는 노예제를 통해서만 가능한 플렌테이션 농장이 미국 서부 지역으로 확대하기 위해서는 이들 지역을 노예주로 만들어야 하지만, 북부인들로서는 노예제에 대한 반감 등의 영향으로 이를 순순히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이 때문에 위도를 기준으로 하는 경계선을 설정하는 등 여러 차례의 정치적 합의와 조정과정이 있었다. 하지만 이같은 조정들이 한계에 다다르면서 남측이 연방정부를 탈퇴한 것이다.
오늘날 미국 중북부를 차지하고 있는 지역들은 노예제를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동부지역 사람들과는 입장이 달랐다. 이들에게 있어서 노예 해방문제는 부차적인 문제였고, 남부 지역이 연방을 탈퇴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이들은 남부주가 연방으로 돌아올 수만 있다면 남부주가 노예제를 받아들이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링컨이 소속됐던 공화당내에서도 마찬가지로 두 가지 흐름이 존재했다. 노예문제보다는 연방문제를 중시한 쪽은 보수파로, 노예문제의 전면적인 해결을 요구한 쪽은 진보파가 된 것이다. 중북부 지방(당시에는 접경주) 북부인 및 공화당 보수파 상당수는 기존 노예주에 한해 노예제를 유지하겠다면 이를 받아들일 용의를 갖고 있었다. 내전중이었기 때문에 이들의 입장이 북에서 남으로 돌아선다면 전세는 남부쪽으로 기울게 될 우려가 컸다.
링컨은 이들을 달래기 위해서 군사적인 측면에서 노예제를 해방해야 한다는 입장을 제시했다. 영화에서도 링컨이 노예제 해방을 군사적인 측면에서 거론하는 것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 때문이다. 간단히 정리해서 당시 미국인들 가운데 일부에게는 남북전쟁이 노예해방전쟁이었지만, 다른 일부에게는 탈퇴한 남부 주들을 연방으로 복귀시기기 위한 전쟁이었다.
2. 흑인 부대가 있었나?
1989년에 나온 영화 '영광의 깃발'을 보면, 남북전쟁이 한참 진행중인 시기에 미국에서 흑인들로만 구성된 부대를 창설하고 이들이 실제 전투에 참여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는 실제 역사적 사실이다. 남북전쟁 당시에 흑인 부대는 존재했고, 전선 곳곳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이들이 용맹한 모습을 보였던 데에는 고통받고 있는 남부의 흑인들을 구하겠다는 사명감이 컸다. 게다가 남군의 포로가 될 경우 백인들과 같은 포로 취급을 받지 못하고 잔혹하게 살해당했기 때문에 이들은 필사적으로 싸울 수 밖에 없었다.
남북전쟁 초기에 북군은 엄청난 인구, 강력한 산업 기반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남군에 맥을 추지 못했다. 남부지역은 농업의 대부분을 노예인 흑인들이 맡고 있기 때문에 생계 걱정을 덜 수 있는 백인들이 주로 참전했다. 남군은 당시 미국에서 가장 뛰어난 로버트 리, 돌벽(stone wall)로 불리운 토머스 잭슨 등의 지휘아래 번번이 열세한 전력으로 북군을 물리쳤다. 이 때문에 미국의 수도 워싱턴은 수차례 함락위기를 맡기도 했다.
당시 열악한 전세를 타개하기 위한 묘안이 흑인 부대였다. 흑인들의 참전은 북군의 숫적 우세를 높일 수 있는 훌륭한 자원이 되는 셈이다. 영화 '링컨'에도 소개되지만 남부 노예주에서는 노예들을 사람이 아닌 재산으로 간주하는데, 북부에서는 이를 원용해 적의 재산인 흑인들을 확보했을 때에는 전쟁중 적의 재산은 북군의 재산으로 받아들인다는 원칙을 받아들여 흑인 병사들을 군대로 받아들였다. 이후 링컨은 제도들을 바꿔 가면서 흑인 병사들의 참전을 받아들여 북군의 전력의 한 축으로 이용했다.
올해로 150주년을 맞는 '노예해방선언'은 이같은 배경에서 발표됐다. 링컨은 1863년 1월 1일 노예해방선언을 했는데, 주된 내용은 반란 상태인 주들의 노예는 전부해방하며, 흑인들에게 연방군(북군)에 참여할 기회를 주는 내용이 담겨 있다. 남부에서 일하던 흑인들이 살던 곳을 탈출해 북부지역에 넘어오면 노예 신분을 벗을 수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즉 미국내에서의 노예제를 사실상 폐지하는 내용이다. 전쟁에 참전한 백인들을 대신해 생산에 종사했던 흑인들이 이탈할 경우 남부 경제는 막대한 타격을 입을 것이고, 노예제는 폐지되며, 북군은 흑인 병사를 충원할 수 있게 되면서 막대한 병력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이 때문에 ‘노예해방선언’은 남군으로서는 엄청난 부담이 됐다.
하지만 이러한 노예해방선언은 약점이 존재했다. 당시 링컨은 전시 상황을 들어서 헌법 가치의 일부를 정지시켰는데, 전쟁이 끝나면 링컨이 전시에 선포한 노예해방선언 등을 비롯한 각종 제도들은 법원 등으로부터 번복될 수 있게 되는 문제점이 있다. 앞서 소개했듯 미국 중서부 지역민 및 공화당 보수파들은 전쟁을 끝낼 수만 있다면 기존의 노예주의 경우 노예제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는 안을 수용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즉, 전쟁이 끝나면 노예해방선언은 번복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링컨은 노예제를 완벽하게 폐지하기 위해서 노예제를 용인하고 있는 미국 헌법을 바꾸려고 했다. 영화 링컨에 나온 수정헌법 13조가 바로 그 내용이다. 만약 당시 헌법이 개정되지 않았을 경우, 링컨이 전시에 내렸던 선언 등은 폐기된 채 노예제가 미국내에서 한동안 남았을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다.
링컨으로서는 그동안 전쟁을 명분으로 노예제 해방의 필요성을 접경주(미국 중북부)인 및 공화당 보수파를 설득했는데, 전쟁이 북군의 승리로 끝나면 더 이상 노예해방의 명분을 내세우기 어려웠다. 때문에 링컨에게는 노예를 해방시키기 위한 시간이 절박했다.
링컨은 사회의식의 수준의 발전을 천천히 이끌어오면서, 가장 적절한 시점에 인간의 자유를 위한 조치들을 발표했지만, 노예제도 만큼은 전쟁이 끝나기 전에 무리를 해서라도 성사시켜야 했다. 링컨은 '결과'를 내기 위해 정치를 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진보를 위해 대통령이 부여된 권력을 행사한 것이다.
3. 링컨은 노예제 폐지론자였는가?
링컨이 어렸던 시절 그는 부모님과 함께 노예주였던 켄터키 주에서 인디애나 주로 이사를 했다. 플렌테이션으로 대규모 농사를 짓는 노예 농장주들과 경쟁이 안 된 탓도 있지만, 그의 부모가 종교적으로 노예제를 받아들일 수 없어서 자유주인 인디애나주를 선택했다는 설명도 있다.
링컨의 정치 초년병 시절부터 이후까지 링컨은 당시를 살았던 급진적인 노예 해방론자들처럼 적극적으로 노예제 문제를 주요 쟁점으로 다루지 않았지만 노예제 해방론자로 알려졌다. 그는 인간의 역사의 방향이 결국에는 노예 해방제로 향할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노예 해방론자로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1858년 일리노이주 상원의원 선거였다. 그는 당시 민주당 후보였던 스티븐 더글라스와 노예제와 관련해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더글라스는 노예제를 선택할 것인지 여부는 각주의 주민들이 자율적으로 판단하자고 주장했다. 이에 반해 링컨은 미국 헌법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노예제의 폐지라며 맞섰다. 당시 선거에서는 더글라스가 승리했지만, 링컨은 이 때의 명연설 등으로 인해 전국적인 주목을 받게 되었다. 당시 더글라스와 벌였던 토론은 링컨을 상원으로 만들지는 못했지만 백악관행의 초석이 됐다.
링컨은 대통령 재임 초기 눈에 띄는 노예제 해방 조치가 미약했다는 지적이 있다. 하지만 노예제 해방보다는 연방 정부의 복원을 중시했던 수많은 북부인들과 일부 공화당원들의 정서를 거스를 수 없었던 링컨으로서는 획기적인 조치를 내놓기 어려웠다. 자칫 접경주들이 남부로 돌아설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시 접경주의 정서를 알려면 이안 감독의 1999년 영화 ‘라이드 위드 데블’을 보라.) 또한 노예제 해방이라는 문제에 대한 국민들의 의식 성장도 필요했다. 당시 미국 백인들은 재판에서 흑인들이 배심원이 되거나 흑인 군인 되는 것에 대한 일종의 두려움을 안고 있었다. 그들로서는 아직 그러한 시대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때문에 링컨은 내각 및 공화당 내에서 굼뜨다는 지적을 받으면서도 점진적으로 노예제 문제를 다뤄왔다. 하지만 그가 노예 해방론자였는지 여부는 수정헌법 13조의 통과를 위해 무리수를 동원하면서까지 이 일을 밀어붙였던 그의 모습만으로도 확인할 수 있을 듯하다.
4. 링컨 옆에 있던 담배 좋아하고 옷 잘 입는 남자는 누구인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링컨 사랑은 매우 유명하다. 4년 전 취임 당시 오바마는 링컨의 성경을 사용해 대통령 취임 선언을 한 데 이어 올해 취임식에서도 링컨과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성경에 왼손을 올리고 취임 선서를 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연설 등에서 링컨이 했던 말을 많이 인용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정부 구성에서도 링컨을 참조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오바마는 대통령에 처음 당선 되었을 때 국무장관에 힐러리 클린턴을 임명했다. 오바마 대통령이 민주당 경선에서 힐러리와 초접전을 벌인 뒤라 양쪽의 앙금이 상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미국 외교정책을 총괄하는 중책에 맡긴 것이다.
이런 사례는 링컨 내각에서부터 있었다. 영화 링컨의 원작으로 알려진 '팀스 오브 라이벌스(Teams of Rivals, 한국명 : 권력의 조건)'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링컨은 자신의 경쟁자들로 내각을 구성했다. '권력의 조건' 저자인 도리스 컨스 굿윈은 공화당 대통령 경선 당시 링컨의 경쟁자였던 인물들이 내각에 들어가서 링컨을 보좌하는 것에 주목해 이 책을 썼다. 영화 링컨에서 보면 수정헌법 13조를 위한 표를 끌어모으는 '작전'을 진두지휘했던 인물이 나온다. 옷 잘 입기로 유명한 멋쟁이이자, 애연가로 유명한 윌리엄 H. 슈어드였다.
링컨이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을 당시, 원래 일반 미국인들인 다른 인물이 대통령 후보가 됐을 것으로 예상했다. 슈어드였다. 하지만 그는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링컨에게 패배했다. 링컨은 대통령에 당선된 뒤 슈어드에게 국무장관직을 부탁했다. 이외에도 링컨은 경선 후보였던 새몬 체이스에게 재무장관을 에드워드 베이츠에게는 법무장관을 맡겼다.
당시 슈어드는 일리노이주 시골 촌뜨기에 불과했던 링컨이 국정을 잘 운영하지 못할 것으로 보고 자신이 사실상의 국정을 맡을 것으로 예상했다. 4년 뒤에 대통령직을 노려볼 수 있었던 그였다. 하지만 대통령을 보좌하면서 그는 링컨이 그 시대가 가장 필요로 하는 지도자라는 것을 알고서는 대통령에 대한 꿈을 버린 채 링컨을 성공한 대통령 만들기에 전념했다.
그는 링컨의 가장 친한 친구중의 하나가 되어서 국정 운영 및 일상 생활의 기쁨을 함께했다. 그는 남북전쟁 중에 영국이 남군과 동맹을 맺는 것을 막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해 남부와 영국과의 동맹을 막아냈으며, 자신이 가졌던 정치 자원들을 총동원해가며 링컨의 가장 헌신적인 조언자가 됐다.
링컨이 존 윌크스 부스에 암살되었을 당시 암살 일당들이 노렸던 3명의 인사 중에는 링컨 외에도 부통령 앤드류 존슨과 국무장관 슈어드가 있었다. 암살범으로서는 링컨이 죽고 슈어드가 대통령이 되는 상황을 막고 싶었던 것이다. 암살범들에게 있어서 슈어드는 또 다른 링컨이었다.
4. 대통령에게 건방진 전쟁장관?
영화 링컨을 보면 납득이 안 되는 몇 가지 장면 중에 하나가 전쟁장관인 에드윈 M 스탠튼이 링컨을 무시하는 듯한 행동을 보이는 대목들이 있다는 점이다.
링컨은 스탠튼을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와 스탠튼과의 처음 만남은 악연으로 시작됐다. 일리노이주 지방의 한 변호사에 불과했던 링컨은 미국 전역을 떠들썩하게 만들 큰 사건을 맡을 기회가 생긴 적이 있었다. 당시 이 재판이 일리노이주에서 열릴 것으로 예상되면서, 일리노이주 현지 변호사로 링컨을 고른 것이다. 하지만 이 재판은 일리노이주에서 진행되지 않았다. 자연히 링컨이 필요 없어진 이들 변호인단은 링컨을 빼고 새로 능력 있는 변호인을 채용했다. 그가 스탠튼이다. 자신이 변호인단에서 제외된 사실을 모른 채 일리노이주 바깥에서 진행된 재판정에 향했던 링컨은 변호인단이 아닌 방청객 자리에서 스탠튼을 보게 됐다. 링컨은 스탠튼의 현란한 실력을 목격하고, 부끄러움을 느꼈던 것으로 알려졌다. 자신과의 실력 차이가 너무나 컸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된 링컨은 전쟁을 치르면서 엄청난 전쟁관련 업무를 능수능란하게 처리할 수 있는 인사가 필요했다. 여러 사람의 교체 끝에 기용된 인물은 링컨에게 굴욕감을 안겨줬던 스탠튼이다. 그는 무척 고지식한 성격으로, 링컨이 결정한 내용이라도 자신의 판단에서 맞지 않다면 이를 번복하려했다. 그리고 그의 재능을 아낀 링컨은 스탠튼의 의견이 더 옳은 의견이라며 그의 판단을 존중하곤 했다. 전쟁 기간 중에 링컨은 병사들에 대해 잦은 사면권을 행사했는데, 엄격한 군령을 시행해야 하는 전쟁부로서는 링컨의 잦은 사면은 곤혹스러워했다. 때문에 양측은 자주 이와 관련된 논쟁을 벌이기도 한다. 외부에서는 두 사람이 갈등을 빚는 것으로 보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완벽한 파트너십을 보였다.
이들의 각별한 우정은 링컨이 사망한 뒤 새삼스레 알려졌다. 링컨이 암살됐을 당시 무뚝뚝하기로 유명한 스탠튼 장관은 비상 상황을 진두지휘하는 한편으로 수시로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고 한다. 영화 '음모자들'에서 그가 그토록 가혹한 인물이 된 것은 링컨에 대한 그의 애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5. 링컨은 왜 연극을 보다 암살 당했나
링컨은 대통령이 되고 워싱턴에 온 다음에야 처음으로 연극을 볼 수 있었다. 윌리엄 세익스피어나 이솝 우화 등을 읽고, 상당부분은 암송할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독서광이었던 링컨은 연극에 매료됐다. 자신의 머릿속으로 상상했던 내용들이 무대에서 펼쳐졌던 연극으로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집무실에서는 각종 전쟁 관련 소식들이 쏟아져 들어오는 한편으로 각종 부탁을 하기 위해 줄을 섰던 민원인들을 응대했던 그로서는 연극이 일종의 휴식처 역할을 했다.
초등학교 과정조차 제대로 마치지 못했던 링컨이 변호사가 되고, 정치인이 될 수 있었던 밑바탕에는 그의 엄청난 학습욕이 바탕에 깔려 있었다. 그는 대학교육을 받았던 다른 변호사들과 상대하기 위해 늦은 나이에도 꾸준히 공부를 계속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변호사가 된 이후에 봤던 책 중에는 수학도 포함돼 있었다.
6. 링컨은 어떻게 기억됐나?
권력의 조건 저자 굿윈은 링컨이 얼마나 세계인의 사랑을 받았는지 하나의 에피소드를 통해 소개했다. 1908년 러시아의 문호 레프 톨스토이는 러시아 남부의 황량한 코카서스 산맥에 살고 있는 부족 추장의 초대를 받았다. 문명과 떨어져 살았던 추장은 가족과 이웃들을 불러놓고 톨스토이에게 유명한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달라고 청했다. 톨스토이는 대표적인 위인들의 삶을 이야기했다. 그가 일어나려 할 때 추장은 그를 붙잡고 이렇게 말했다."아직 당신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지도자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그는 영웅입니다. 그는 천둥 같은 목소리로 말했고, 해돋이처럼 웃었으며, 바위처럼 확고하게 행동했습니다. 그의 이름은 링컨이고, 그가 살았던 미합중국이라고 합니다. 그곳은 너무 멀어서, 젊은이가 걸어서 거기에 닿고 나면 노인이 되어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 사람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톨스토이가 그들에게 링컨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 부족 사람들은 그에게 감사하면서 훌륭한 말 한 마리를 선물했다. 다음날 부족 사람들은 조심스럽게 톨스토이에게 링컨의 사진을 가져다줄 수 있는지 부탁했다. 톨스토이는 친구를 통해 사진을 구해 이를 부족장에게 건넸는데, 이를 받는 부족민들의 손은 떨렸다고 한다. 톨스토이가 바라본 그들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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