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쿠버 동계올림픽에 또 한 명의 영웅이 탄생했다. 아시아인으로는 도전하기 힘들다는 스피드스케이팅 장거리에서 세계 정상에 우뚝 선 이승훈 선수,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신화를 창조했다. 올림픽 무대 첫 도전인 5000m에서 은메달을 따면서 주목을 받은 그는 10000m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며 한국 빙속의 전성시대를 활짝 열었다.


초등학교 시절 스피드스케이팅을 했지만 중학교 때 쇼트트랙으로 전환해 지난해 2월 동계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선 3관왕에 오른 기대주였던 그가 다시 스피드스케이팅을 타기 시작한 것은 쇼트트랙 대표 선발전에서 탈락하면서부터, 잠시의 방황을 접고 지난해 여름부터 독하게 훈련에 매진한지 7개월여 만에 이룬 쾌거다. 스피드스케이팅 선수로는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야생마' 그의 근성과 투지가 그의 말대로 "기적같은 일"을 만들어 냈다.

큰 기대를 걸지 않았던 모태범 선수가 남자 스피드스케이팅에서 연거푸 금메달과 은메달을 따고 이상화 선수도 여자 500m에서 금메달을, 이승훈 선수의 질주까지 한국 3인방의 쾌거에 모두 "서프라이즈"를 외치며 탄성을 보냈다. 외신들도 빙속 경기에 불어 닥친 한국돌풍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눈치다.


한국이 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것은 1948년 생모리츠 동계올림픽 이후 62년만의 일이며 일제 강점기였던 1936년 독일에서 열린 동계올림픽에서 김정연 선수가 일장기를 달고 처음 올림픽 무대에 선지 74년만의 일이다. '동계올림픽 하면 쇼트트랙'이란 등식이 생겼을 정도로 뒤처지고 불모지로 여겼던 스피드스케이트에 새 역사를 쓴 것이다.

그들이 스피드스케이트의 새로운 강자로 우뚝 서기까지는 그들만의 가치가 있었다. 20대 초반의 동기생인 그들에겐 특유의 훈련 방법과 혹독한 땀과 노력 또 젊은이들이 가지는 새로운 문화가 있었다.


0.01초로 승부가 갈리는 상황에서 누가 코너를 잘 도느냐는 메달 색깔을 정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우리 선수들은 스피드스케이팅에 쇼트트랙을 접목한 소위 '퓨전 훈련'을 해왔다. 지난해 여름 쇼트트랙 스케이트를 신고 코너링 훈련에 집중하며 쇼트트랙 강국답게 양 종목의 강점을 하나로 결합해 선수들의 경기력을 끌어올린 것이다.


또 젊은 선수들의 오기와 투지도 승부욕을 높이는데 한몫했다. 모태범 선수가 금메달을 딴 뒤 언론들이 나에게 질문을 안 하는 무관심이 오히려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듯이 주위의 무관심은 오히려 한번 해보자는 오기를 자극했다. 또 이상화 선수의 노란 굳은살이 선명한 '황금발'은 그들이 얼마나 훈련을 했는지 국민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특히 "엣지있게 후회없이 즐겨" 이상화 선수의 미니홈피에 걸려 있던 글처럼 그들은 놀듯이 경기를 즐기고 결과를 스스럼없이 받아들이는 자세를 가졌다. 메달을 목에 건 그들의 눈에는 눈물보다 웃음이 묻어난다. 가난했던 시절 혹독한 훈련을 떠올리며 연신 눈물을 닦고 국민들까지 목을 매게 했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에서 육상 3관왕에 올라 펑펑 울었던 악바리소녀 임춘애와는 분명 다른 유전자를 가진 것이다.


500m에서 우승하고 1000m에서는 23등을 하고도 즐겁게 인터뷰하는 이상화나, 피어신을 하고 양 팔목에 염주를 차고 머리에 초록색 버섯돌이 모자를 쓰고 태극기를 흔드는 모태범이나, 자신의 우승을 기적이라고 스스럼없이 말하는 이승훈이나 그들에게는 경쟁을 축제로 만드는 유연함과 성취감을 솔직히 표현하는 자신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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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대 3인방의 낭보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자신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며 혹독한 훈련도 즐길 줄 아는 젊은이들, 우리는 그들에게서 희망을 보고 행복해 한다. 그러나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이태백'과 '청년실신' 등 신조어가 판을 치는 현실을 대하며 갑자기 기운이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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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현직 논설실장 jigk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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