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청년들의 현실 그린 영화 '잠자는 바보'

영화 '잠자는 바보'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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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기성세대는 자신들의 젊은 시절을 잣대로 젊은 세대의 무기력을 지적한다. 알고 보면 경제적 불안과 사회 구조적 제약 속에서 미래를 장담할 수 없어 나타나는 현상이다. 자연스럽게 '지금 여기'에 집중하며 하루를 살아간다.


이와 유사한 흐름은 일본 청년 세대에서 먼저 나타났다. 청년 초기에 정규직과 비정규직, 아르바이트 노동자 간 급여나 생활 수준 격차가 눈에 띄지 않으면서 심화했다. 나이를 먹고 결혼과 육아, 부모 부양 같은 장기적 책임이 부과되면서 그 차이는 확연히 드러난다. 사회보험 가입 여부, 저축과 자산 규모, 안정적 수입 여부 등이 선택 폭과 삶의 질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구조적 모순 속에서 일본 청년들이 느끼는 현실은 영화 '잠자는 바보' 속 유미(구보 시오리)와 루카(다이라 유우나)의 일상을 통해 섬세하게 드러난다. 흥미롭게도 이 작품은 2006~2008년 연재된 동명 만화를 올해 영화화한 것으로, 단순한 영상화가 아니라 일본의 '잃어버린 30년' 동안 청년 세대가 겪은 변화와 지속성을 동시에 보여주는 의미 있는 선택으로 읽힌다.


대학 여자기숙사에서 함께 지내는 후배 유미와 선배 루카는 각자의 속도로 하루를 살아간다. 루카는 인디 밴드 '피트모스'에서 음악적 꿈을 좇고, 유미는 목표 없이 아르바이트하며 시간을 보낸다. 사카모토 유고 감독은 이들이 반복되는 일상에서 서로에게 스며들고 영향을 주는 과정에 집중한다. 쌓여가는 관계와 자아의 의미를 부각하며 목표 없는 하루조차 가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저성장과 불평등 속에서 미래 설계에 어려움을 겪는 일본 청년들에게 보내는 위로다.

영화 '잠자는 바보'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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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부터 이어진 경제 침체 속에서 일본 청년들은 한 번도 호황을 경험하지 못했다. 임금 상승률이 지난 30년 동안 단 4.4%에 불과했다. 정규직보다 아르바이트 급여가 높은 경우가 발생하기도 했다. 낮은 임금과 제한된 계층 이동의 사다리는 청년들에게 생존을 위한 현실적 선택을 강요한다. 일부는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하며 소소한 행복에 만족하고, 일부는 해외로 눈을 돌리며 현실을 탈출한다.


이 과정에서 등장한 '사토리 세대(悟り世代)'는 표면적으로 물욕을 내려놓고 깨달음을 얻은 듯 보인다. 실제로는 의욕과 희망 자체가 없는 것이 아니라, 사회 구조와 경제적 여건이 만든 선택의 결과다. 꿈이 '없어서'가 아니라, 현실적 이유로 꿈을 '거부'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다소 소극적이고 무모한 도전을 피하는 듯한 모습은 낮은 임금과 불안정한 고용, 늘어나는 고령자 부담 속에서 현실적인 선택을 한 결과로 해석될 여지가 크다. 이들의 속도와 선택을 문제 삼기보다, 청년이 자신의 목표를 실현할 수 있는 환경과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는 일이 선결과제인 셈이다.


유미와 루카의 느린 하루는 이런 맥락을 시각화한다. 목표가 없다고 무가치한 하루가 아니며, 거대 담론에 매달리지 않아도 작은 선택과 관계 속에서 충분히 의미 있는 시간을 만들 수 있음을 보여준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지지하는 경험은 청년에게 안정과 행복을 제공하며,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기회가 된다. 사카모토 감독이 포착한 청춘의 느린 리듬은 바로 이런 공감에서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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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경제적 성공이나 사회적 성취만이 삶의 가치는 아니라는 단순한 주장에 그치지 않는다. 청년이 스스로 선택하고 자기 삶을 책임질 권리가 존중되는 사회의 필요성까지 제기한다. 구조적 문제의 해결은 여전히 요원하다. 하지만 유미와 루카의 느린 하루가 보여주듯, 청년들은 제약된 환경에서도 나름의 방식으로 삶의 가치를 만들어가고 있다. 이런 일상의 작은 선택들이 쌓여간다면, 언젠가는 더 나은 변화의 토대가 마련될 수 있다. 그리고 그 시발점은 기성세대의 성급한 판단이 아닌 청년 세대가 스스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지켜보고 지지하는 자세일 것이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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