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직장에 다니는 50대 후반 남성 A씨는 수년 전 회사 업무 중 갑자기 말이 어눌해지고, 시야가 좁아지는 증상을 느꼈다. 곧장 가장 가까운 대학병원 응급실에 찾아간 그는 초기 뇌경색 응급치료로 정상 회복됐다. 얼마 후엔 아무 데도 부딪히지 않은 다리에 멍이 들었다. 처음엔 가볍게 생각했지만, 뇌경색 후유증 혈전이 하지정맥을 막았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다시 그 병원에 찾아갔다. 의사는 혈전이 위로 올라와 뇌혈관이나 심혈관을 막기 전에 와서 천만다행이라고 했다.
정부는 사직 전공의가 돌아올 기미가 없자 상급종합병원의 '뉴 노멀(새로운 표준)' 시범사업 준비에 착수했다. 절반이 넘는 전공의들의 사직 처리가 완료됐고, 정부는 오는 9월부터 상급종합병원 구조 전환 시범사업에 돌입한다. 시범사업은 상급종합병원은 전문의 위주로 중증·응급·희귀환자 진료에 집중하고 경증 환자는 1·2차 병원으로 보내는 것이 골자이다.
대한뇌졸중학회는 최근 현행 환자분류체계를 바꾸지 않으면 뇌졸중 환자 대부분은 정부 계획으로 구조 전환되는 상급종합병원에서는 치료받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현행 환자분류체계에 따르면 뇌졸중 환자의 80% 정도는 1·2차 병원 치료 대상인 일반진료질병군으로 분류되기 때문이다.
진료협력시스템을 통해 진료 의뢰 제도를 개편하겠다는 방안도 환자 불편을 가중시킬 것으로 보인다. 서울의 대학병원 관계자는 "1·2차 병원에서 3차 병원으로 상향 진료 의뢰를 하거나 반대로 하향 전원시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고 했다. 주치의 간 충분한 논의의 선행과 진료 기록 등을 공유하는 과정이 쉽게 뚝딱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관계자는 "안 그래도 부족한 의료 인력이 불필요했던 추가 업무까지 감당하고, 환자들은 적시에 치료받지 못하는 경우가 생길 것"이라고 말했다.
중증과 경증의 경계에 있는 환자를 '회색지대 환자'라고 부른다. 뉴 노멀 의료 시스템에선 회색지대 환자를 지켜주는 안전망이 사라질 것으로 우려된다. A씨 사례처럼 뇌졸중이나 심근경색 환자 상당수는 전조증상을 느끼고 병원에 스스로 찾아간다. 환자가 이런 경로로 병원을 찾아오면 구급차에 실려 오는 게 아니라 걸어서 온다고 해서 '워크 인'이라 부른다. A씨처럼 경증으로 보이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상급종합병원 워크 인을 막으면 뇌졸중이나 심근경색 등의 전조증상을 가진 환자는 더 위험해지거나 작은 병원을 돌다가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 현재와 다른 의미의 '응급실 뺑뺑이' 피해가 우려되는 것이다.
정부의 뉴 노멀 시범사업은 환자가 당하는 다양한 위험 상황에 대한 충분한 고려 없이 추진되는 듯하다. 의료개혁특별위원회가 지난 11일 발표한 상급종합병원 구조 전환 방향에서 회색지대 환자에 대한 대비는 '두 단계에 걸쳐 중증도 분류를 개편하겠다'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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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여론조사에서 10명 중 9명이던 의대 증원 찬성 비율이 최근 조사에선 10명 중 6명꼴로 줄었다. 정부의 그간 의료개혁 행보가 국민에게 만족스럽지만은 않았음을 방증한다. 준비가 부족한 의료개혁의 피해는 국민과 환자에게 돌아간다. 정부는 환자 한명 한명을 놓치지 않는 개혁안을 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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