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Next]유동성 쪼그라들자 민낯 드러난 한국 자본시장
라덕연 일당 주가 조작, 폰지사기 의혹 사건 등 금융범죄 줄이어
돈가뭄, 수익률 하락, 당국의 리스트 관리 강화 등에 밑바닥 드러내
미국발 금리 인상으로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이후 자본시장에 넘쳐나던 돈이 썰물처럼 빠지며 '돈가뭄'이 이어지면서 수면 아래서 횡행하던 불법, 불공정거래가 속속 드러나고 있다. 넘치는 유동성과 익명성 뒤에 숨어 다단계 사기 등의 수법으로 한탕을 노리던 금융범죄 세력들이 돈가뭄과 수익률 하락, 당국의 리크스 관리 등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밑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밑바닥 드러내는 조직적 금융범죄
소시에테제네랄(SG)발 주가 폭락 사태의 여진이 가시기도 전에 수천억원대 '폰지사기' 사건이 또 터졌다. 영화 '기생충' '영웅' 등 유명 작품에 투자했던 자문사 대표가 거액의 투자금을 유치한 후 돈을 빼돌렸다는 의혹이 제기돼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 수익금을 돌려막는 다단계 투자사기인 이른바 '폰지사기' 수법으로 의심되며, 피해액이 수천억원대로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경찰은 비상장회사에 투자한다며 고액자산가와 기업가 등으로부터 투자금을 받아 빼돌린 혐의를 받은 투자자문사 관련자들을 사기 등 혐의로 입건해 수사하고 있다. 서울경찰청 금융범죄수사대는 유사수신과 사기 등 혐의를 받는 A씨 등 C투자자문사 관계자 여러 명을 입건해 수사 중이다. A씨는 비상장주식에 투자해 '연 30% 상당의 수익금을 돌려주겠다'며 많게는 1인당 100억원에 이르는 투자금을 받은 후 빼돌린 혐의를 받는다. 경찰이 현재까지 파악한 피해액은 1000억원에 이른다. 피해자 수십여명의 진술도 확보했다. 경찰은 피해자가 더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A씨는 2013년부터 C투자자문 대표를 지내며 영화 '기생충' '영웅' '공작' '엑시트' '사바하' 등에 투자해 수익을 낸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부동산 관련 P사를 인수해 비상장기업 투자로 고수익을 낼 수 있다며 기업가 등 자산가를 상대로 투자금을 모은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P사가 무인가, 미신고 투자자문영업을 한 것으로 보고 A씨에 관련 혐의를 적용해 수사 중이다. 앞서 불거진 SG발 주가 폭락 사태와 유사하다. 금융 사기꾼이 판을 짜고, 고수익에 눈이 먼 투자자들의 탐욕이 합쳐진 전형적인 금융범죄다. 김광중 한결 변호사는 "보도된 사실관계에 따르면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의 사기죄와 횡령죄 성립 가능성이 크고, 인허가 없이 투자자문 영업을 한 것에 대해 자본시장법위반죄 성립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이어 "문제는 피해자들의 손해배상청구인데 불법행위 손해배상책임을 물을 수 있지만 관건은 가해자들의 재산으로부터 강제집행을 할 수 있는지 여부이기 때문에 이를 위해선 검찰에서 가해자들 재산에 추징보전조치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양석조 남부지방검찰청 검사장, 이복현 금융감독원장, 김주현 금융위원회 위원장, 손병두 한국거래소 이사장(왼쪽부터)이 23일 서울 여의도 한국거래소에서 열린 불공정거래 근절을 위한 유관기관 합동토론회에서 나란히 섰다. 사진=연합뉴스
원본보기 아이콘시장 상황 나빠지면서 돌려막기 한계
금융투자업계에선 최근 불거진 일련의 주가 조작 및 금융사기 사건들이 시장의 유동성이 사라지면서 더 이상 상장이던 비상장이던 주가를 부양할 동력을 잃으면서 한꺼번에 무너졌을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투자은행업계 한 관계자는 "일종의 '계'처럼 새로운 투자자의 돈을 받아서 먼저 투자한 사람들에게 돌려주는 비정상적인 행태"라며 "시장이 좋을 때는 문제없이 돌아갔지만 시장 상황이 악화하면서 돌려줄 돈이 사라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비상장 시장은 코로나19 이후 넘치는 유동성을 기반으로 유니콘(기업가치 1조원 이상 비상장사)이 봇물을 이뤘다. 잠재력으로 평가받는 비상장 시장에선 유동성과 기대감이 기업가치 상승으로 이어졌다. '부르는 게 값'이고, 일반인들까지 비상장 주식 투자에 뛰어들 정도였다.
하지만 글로벌 긴축 기조에 투자심리가 꽁꽁 얼어붙으면서 투자자들의 시선은 냉정해졌다. 예기치 못한 원자재 가격 상승과 고금리에 시장이 얼어붙고, 유망 기업의 가치가 추락했다. 유동성의 파티 끝에서 연기금, 공제회를 비롯해 보험사, 증권사 등 국내 기관 투자가들의 투자 재원도 크게 줄었다. 주식시장에선 수익을 내기 어렵게 됐고, 채권 부문은 금리 상승에 따른 평가손실이 늘면서 대형 기관들도 자기 곳간을 지키기도 벅찼다.
이런 자본시장의 불안정과 고금리 상황 속에서 금융당국이 부실 리스크 관리에 들어간 들어간 것도 최근 사태들이 불거진 배경 중 하나다. 당국은 강원도 레고랜드발 프로젝트 파이낸싱(PF) 유동화 증권 부실 사태 이후 금융자본시장 위기관리에 포커스를 맞춰왔다.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 시그니쳐은행, 퍼스트리퍼블릭은행 등의 연이은 파산으로 시장 분위기가 살얼음판이 되면서 당국의 리스크 관리 강도는 연일 높아졌다. 금융사 부실 위기 대응을 위한 스트레스테스트부터 시작해 이상거래나 불공정거래 등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에 나섰다.
기관장들 자본시장 질서위반 '엄벌' 한목소리
23일 김주현 금융위원회 위원장, 이복현 금융감독원 원장, 손병두 한국거래소 이사장, 양석조 서울남부지검 검사장 등 4개 기관의 기관장은 자본시장 불공정거래 적발 및 대응을 위한 기관 간 협업체계를 대폭 강화하기로 하고 자본시장 불공정거래를 뿌리 뽑기 위한 의지를 피력했다. 김주현 위원장은 "자본시장 불공정거래는 정직한 서민 투자자와 청년들의 미래를 빼앗아가는 중대한 범죄"라며 "올 한 해 관계기관과 함께 비상대응체계를 가동해 불공정거래 척결을 집중 추진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또 "현재 국회에서 논의 중인 자본시장법 개정 법안이 통과되면 주가 조작 범죄 처벌과 부당이득 환수가 대폭 강화될 것"이라며 "추가적인 제재 강화 방안도 적극 검토·추진하는 한편, 최근 제기되고 있는 차액결제거래(CFD)의 문제점에 대해서도 조만간 제도 개선 방안을 확정해 발표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이복현 원장은 "위법적 행위에 대해 무관용 원칙을 일관되게 적용해 엄중한 감시와 조사, 처벌 등을 통해 시장질서를 확립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이번 사태를 반성의 계기로 삼아 사전 예방적 시장감시 기능 강화, 조사업무 조직 체계 개편을 통한 업무 효율성 제고, 유관기관과의 협업 강화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손병두 한국거래소 이사장은 "최근 주가 급락 사태를 계기로 불공정거래 적발 체계상 부족했던 부분 전반을 재점검 하고 있으며, 급변하는 시장환경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감시체계를 구축하기 위해 유관기관 수사·조사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시장감시 기준 및 심리기법 고도화, 시장감시 활용 정보 확대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강조했다.
양석조 서울남부지검 검사장은 "자본시장 범죄 대응은 '골든타임'이 분명히 존재한다"면서 "골든타임을 지킬 수 있는 유관기관 간 체계적인 정보 공유, 신속한 대응 시스템 확립을 위해 노력하고, 불공정거래에 상응하는 엄정한 법집행에서 더 나아가 불법 수익을 끝까지 추적하고 환수해 범죄자들이 더 이상 자본시장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못박았다.
"과열된 부분에서 선별적인 관리감독 필요"
반복되는 금융사고와 이를 엄격하게 관리하려는 당국의 경직된 분위기 속에서 국내 자본시장은 잔뜩 움츠려 있다. 당국의 관리감독이 엄격해진 데다, 추후 부실 규모를 예측하기 어렵게 되면서 증권사, 캐피탈 등에선 예정됐던 투자를 줄줄이 보류하고 있다. 하지만 좀 더 거시적으로 보면 상황이 나쁜 편은 아니다. 제롬 파월 미 연방준비제도 의장이 은행 위기로 금리 인상 중단 가능성을 시사하는 등 자본 및 부동산 시장의 분위기가 다시 꿈틀거리고 있다. A공제회 한 관계자는 "지금 시장 분위기가 다시 좋아지는 것 같아서 과감하게 집행하라고 직원들에게 지시했다"며 "부동산 가격도 조금씩 움직이는 등 나쁘게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미국 은행 파산 이후 경직됐던 글로벌 시장 분위기는 조금씩 풀리고 있지만, 코로나19 이후 급격하게 팽창했다가 쪼그라든 자본시장에서 불법적 투자행태를 제대로 잡아야 한다는 당위성도 엄연하게 존재한다. 금융투자업계 한 관계자는 "시장의 정상적인 작동을 위해선 당국의 현명한 리스크 관리가 필요하다"며 "전방위 단속보다는 과열된 부분에서 선별적인 관리감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