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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은모의 酒저리]지시울양조장, 자신만의 향취 가득한 꽃 같은 술 빚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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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강원 춘천 '지시울양조장'①

아버지께 드릴 술 빚다 전통주 매력에 빠져
후회 없는 삶 위해 양조장 설립 결심
화전일취 백화, 과하주 방식으로 만든 백화주

서암 사언 화상은 날마다 자기 자신을 “주인공!”하고 부르고서는 다시 스스로 “예!”하고 대답했다. <무문관無門關> 제12칙, ‘암환주인(庵喚主人)’


중국 당나라 말기 승려 서암 사언(瑞巖 師彦·850~910)은 매일 아침 자신에게 ‘주인공(主人公)’이라고 부르고 그에 답하는 자문자답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서암 스님이 날마다 자신이 주인공임을 아로새긴 것은 하루하루를 주인공으로 살아가는 것과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는 것이 다르지 않기 때문이었다.

대승불교가 꿈꾸는 이상세계를 가리키는 말이 ‘화엄(華嚴)’이다. 화엄이란 온갖 꽃으로 장엄하게 장식한다는 뜻의 ‘잡화엄식(雜華嚴飾)’에서 나온 말로, 수많은 꽃들이 자기만의 삶을 긍정하며 만개한 장관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다. 타인의 삶의 조연이나 노예가 아닌, 스스로 주인공으로 살아가는 삶이 꽃밭처럼 가득한 세상이 바로 화엄세계다.


활짝 핀 화엄세계의 꽃처럼 주인공으로 거듭나기 위해선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그래야만 “주인공!”이란 부름에 “네!” 하고 당당하게 답할 수 있다. 주인공이란 부름에 자신 있게 답하기 위해 술을 빚기 시작한 양조가, 그런 양조가가 자신만의 향취 가득한 꽃 같은 술을 빚어내는 곳, ‘지시울양조장’이다.


[구은모의 酒저리]지시울양조장, 자신만의 향취 가득한 꽃 같은 술 빚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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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겁고 재밌는 일 찾아 떠난 길목서 마주한 양조가의 길

누구에게나 인생의 전환점이 있다.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사람과의 만남이나 이별이 그러하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취직이나 결혼, 출산 같은 생애주기별 이벤트가 그러하다. 유소영 지시울양조장 대표에게는 아들의 대학 입학이 그러했다. 유 대표의 아들은 스케이트를 탔다. 유 대표는 그런 아들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고속도로를 탔다. 6년 동안 춘천과 서울을 왕복하며 내달린 거리만 32만 킬로미터였다. 고된 일이었지만 아들이 즐기고 잘 하는 일이었기에 기쁘게 견딜 수 있었다.

그렇게 아들은 원하던 대학에 입학했고, 유 대표는 해방감을 느꼈다. 그 안에 자리 잡고 있던 의무감으로부터의 해방이었다. 유 대표는 자식들에게 즐거운 일, 재미있는 일을 하면서 살라고 말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돈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건 시간이라고, 그러니 하루하루를 즐겁고 재미있게 살아야한다고 말하고 또 말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그리 살지 못했다. 그래서 찾기 시작했다. 재미있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을.


사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즐겁게 살라는 이야기는 유 대표가 아버지에게 항상 듣던 말이었다. 유 대표의 아버지는 권위를 앞세워 자신의 의견을 강요하기보다는 딸이 스스로 고민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조언하고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그에게 아버지는 삶의 멘토이자 기준이었다. 그런 아버지가 보시기에 좋은 딸이고 싶어 나름대로 노력하며 살았지만 정작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마음을 전한 일은 많지 않았다.


지시울양조장의 '화전일취' 제품군.

지시울양조장의 '화전일취' 제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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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춘천시 서면 현암리의 옛 이름 '지시울' 가져와

그러다 문득 눈에 들어온 것이 전통주였다. 유 대표는 “친구 분들과 모여서 술 한 잔씩 기울이시는 게 아버지에게는 큰 즐거움이셨다”며 “잘 배워서 생신상에 좋은 술을 한 번 빚어드리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상했다. 그 길로 유 대표가 찾아간 곳이 한국전통주연구소였다. 그곳에서 고문헌 등을 토대로 수백 종의 전통주를 복원해 낸 전통주 업계의 대부 박록담 소장으로부터 술을 배웠다.


가양주 과정부터 특기주 과정, 고문헌 과정 등 연구소의 모든 교육과정을 이수하는데 3년이 걸렸다. 술을 배우며 유 대표는 내내 즐거웠다. 양조법에 따라 매번 각기 다른 매력을 품은 술이 만들어지는 게 신기했고, 전통주를 대하는 스승의 진정성도 마음에 들었다. 유 대표는 “처음엔 쌀 4킬로, 8킬로씩 빚던 것이 나중에는 한 말, 두 말로 늘어났다”며 웃었다.


술에 대한 유 대표의 열정과 실력이 날로 커져가고 숙성되고 있음을 스승이 모를 리 없었다. 칭찬에 인색하던 스승은 제자의 술에 “더할 나위 없다”는 칭찬과 함께 양조장 설립을 권했다. 상업양조에 뜻이 없던 그였지만 살면서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다는 생각이 마음을 달리 먹게 만들었다.


유 대표는 “술 빚는 일이 너무 즐거워 밤마다 담가둔 술을 들여다보곤 했다”며 “이렇게 즐거운 일을 찾는다는 게 살면서 흔치 않은 일일뿐더러 기회가 왔을 때 잡지 않고 흘려보낸다면 나중에 후회하고 미련이 남을 것 같았다”고 말했다.


그렇게 2020년 8월 양조장 문을 열고 그해 10월에 첫 술을 선보였다. 지시울이라는 이름은 유 대표가 나고 자라온 동네이자 양조장이 자리 잡고 있는 강원 춘천시 서면 현암리의 옛 이름인 지시울에서 가져왔다.


지시울양조장에선 발효를 마친 술을 옹기에 담아 저온숙성한다.

지시울양조장에선 발효를 마친 술을 옹기에 담아 저온숙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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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전일취 백화… 은은한 꽃향, 그윽한 우아함 추구

지시울양조장에서 빚어내는 술은 모두 ‘화전일취(花前一醉)’라는 이름을 달고 세상에 선보인다. 화전일취는 다산 정약용의 아들인 유학자 정학유가 지은 가사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에 나오는 표현으로 ‘님도 꽃이요, 꽃도 꽃이니, 꽃 앞에서 함께 취하리’라는 뜻을 담고 있다.


지시울양조장의 화전일취 가운데서도 가장 밑바탕이 되는 술이 약주인 ‘화전일취15’다. 이 술을 토대로 탁주인 ‘화전일취12’, 증류식 소주 ‘화전일취38·52’, 과하주 ‘화전일취18 백화’까지 모든 술들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화전일취15는 춘천에서 나는 멥쌀로 범벅을 쑤어 전통 누룩을 넣어 밑술을 하고, 찹쌀 고두밥으로 덧술을 하는 이양주 방식으로 만든다. 덧술까지 마친 이양주는 100일가량 발효한 뒤 옹기에서 두 달 이상 저온숙성을 거쳐 완성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약주는 풍부한 향과 낮은 산미, 은은한 감칠맛이 감돈다. 유 대표는 “기본이 되는 약주가 잘 나와야 탁주나 소주도 잘 나온다”며 “향이 좋은 술을 만들기 위해 범벅으로 밑술을 하고 누룩을 적게 사용해 누룩취가 적게 나도록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 전통주는 같은 쌀을 사용하더라도 죽, 백설기, 구멍 떡, 범벅, 고두밥 등 가공 형태에 따라 맛과 향, 알코올 도수가 달라지는데, 상대적으로 높은 도수와 날카로운 향을 입히기 위해 범벅을 선택했다는 게 유 대표의 설명이다.


화전일취15가 지시울양조장의 뼈대와 같은 술이라면 양조장의 정체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대표 술은 과하주인 화전일취18 백화다. 과하주(過夏酒)는 ‘여름을 넘기는 술’이란 뜻으로 알코올 도수가 높아 ‘앉은뱅이 술’이라고도 불린다. 과하주는 발효주에 증류한 소주를 넣어 다시 발효·숙성시키는 방식으로 도수를 높인 술이다. 일반 발효주보다 도수가 높은 만큼 여름철 고온에서도 술이 상하지 않아 오랜 기간 두고 마실 수 있다. 포르투갈의 포트와인 같은 주정강화 와인과 양조법이 유사하며, 우리 주세법상으로는 혼성주로 분류된다.


화전일취18 백화는 화전일취 제조법으로 빚은 술덧에 전통 소주고리로 증류한 소주와 다양한 꽃을 넣어 만든다. 유 대표는 “과하주는 우리 고문헌에 나오는 술 가운데 거론 횟수가 1·2위를 다툴 정도로 양반가에서 즐겨 마시던 술”이라며 “옛 전통방식을 그대로 재현해 많은 양의 소주와 함께 꽃을 넣어 우아한 향과 맛을 내는 데 집중했다”고 설명했다.


화전일취18 백화는 과하주 방식으로 빚은 백화주(百花酒)이기도 하다. 백화주는 이름 그대로 100가지 꽃을 넣어 만든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술로 다양한 꽃을 양조과정에 사용해 은은한 꽃향이 술에 퍼지도록 만든다. 화전일취18 백화에도 모란·매화·복숭아꽃·국화꽃·연꽃·장미·찔레 등 총 22종의 꽃이 들어가는데, 유 대표는 술에 들어가는 모든 꽃을 직접 재배해 꽃봉오리가 필 때 맞춰 일일이 손으로 따고 다시 말려서 사용한다. 여간 정성이 들어가는 일이 아니다. 스무 종이 넘는 꽃이 들어가지만 화전일취18 백화에선 어느 꽃향 하나 크게 도드라지지 않는다. 한 모금 마시면 입안에 은은한 꽃향의 여운이 감돌뿐이다. 유 대표는 “그것이 저희 술의 성격”이라고 말했다.


화전일취18 백화는 유 대표가 술을 배우면서 내내 품고 있던 백화주에 대한 꿈을 실현해 낸 결과물이다. 유 대표가 스승인 박록담 소장으로부터 화전일취라는 이름을 받아든 순간 이 술은 세상에 나올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을지 모른다. 그는 “화전일취18 백화는 화전일취라는 이름에 가장 적합한, 우리 양조장을 가장 잘 대표하는 술”이라며 “꽃 같은 사람들과 부드럽고 달콤한 술을 나누며 향기로운 시간을 함께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구은모 기자 gooeunm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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